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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교육공간

향교구역
향교구역_개요

마을마다 하나씩 세운 공립학교

지방의 공교육을 담당한 전통 교육기관이 바로 향교이다.
지방에 학교가 세워진 것은 과거제도가 시행되기 시작한 고려시대부터였다.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통치이념인 성리학을 보급시키기 위해 '한 읍마다 한 학교(일읍일교)' 원칙에 따라 모든 군현에 지방학교라는 뜻의 향교를 세웠다.

관아 가까이 자리 잡은 학교

교촌, 교동, 향교동, 교운리, 교성리, 교흥리, 교월리, 교원리, 대교리, 교사리, 교평리, 교현동이라는 땅이름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동네 이름에 '교(校)'자가 들어 있다는 것으로 오래전에 그 동네에 향교가 있었음을 나타낸다.
향교는 공립학교인 관학이므로 수령이 머무는 관아에서 멀지 않은 고을 중심지에 위치한다. 조선시대의 문헌자료에는 관아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향교가 자리 잡기도 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것은 사학인 서원이 한적하고 경치가 수려한 곳에 위치하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따라서 향교가 있었던 곳은 도회지 가운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사공간과 교육공간을 조화시킨 배치

향교 건축은 엄격한 윤리 의식을 공간의 서열에 반영하여 질서와 균형을 이루는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향교의 배치는 국립대학인 성균관을 모방하고 있다.
공자와 유학의 선현을 제사 지내는 대성전을 중심으로, 동서무를 좌우에, 내삼문을 가운데 두고 주변을 담장으로 두른다. 또 학생들을 교육시키는 명륜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서재를 배치하여 교육공간을 만든다.
배치형태는 대성전과 명륜당의 위치에 따라 전묘후학, 전학후묘, 좌묘우학, 우묘좌학으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우리나라의 지형 조건에 맞게 경사지에 배열된 전학후묘의 배치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유학의 아버지 공자의 정신을 이어받는 교육공간

전국의 모든 향교에서는 현재까지 봄가을에 공자에게 제사를 올리는 석전대제가 행해진다. 유학의 시조인 공자를 교육의 지표로 삼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교의 기본정신을 배우고 익히며 점검하는 곳이 바로 지방의 향교였다. 사회교화의 이념은 바로 유교였다. 결국 향교는 국가가 유교윤리를 보급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세운 공립학교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