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한국국학진흥원
   지형별 전통건축>동래부_해안형>다스리기/살아가기
URL

동래부_해안형

다스리기/살아가기
행정공간

동래부의 관아는 정3품 당상관이 부사로 임명되는 국방이나, 외교적으로 중요한 곳이므로 위용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동헌인 충신당을 중심으로 서쪽에 독경당, 찬주헌, 완대헌, 서북쪽에 객사인 봉래관, 동쪽에 연심당과 회식당, 남쪽에는 공수청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동헌의 대문인 동래도호아문, 즉 망미루와 외대문인 독진대아문이 남아 있다. 망미루는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관아 대문인데, 누의 위에는 동래 4대문의 개폐와 정오를 알리는 큰 북이 걸려 있었다. 주목할 점은 동래는 해안의 방위가 중요하므로 육군보다는 해군을 중시하였다. 그래서 좌수영의 영진도 해안지방에 따로 두어 병선과 해군을 관할하였다.

교육공간

부산지방의 유일한 공립교육기관인 동래향교는 조선 초기에 창건한 것으로 보이지만 명확한 기록이 없다. 임진왜란 때 동래성 함락과 함께 불타버리고, 왜란이 끝난 후인 선조 38년(1605)에 동래부사 홍준이 재건하였다. 명륜당을 중심으로 반화루와 동서재가 자리한 교육공간과 대성전과 동서무를 중심으로 한 제사공간 등 12동의 건물이 서 있다.
안락서원은 임진왜란 때 순절한 부사 송상현과 무명의 성 백성들을 추모하는 사당에 1642년(인조 2)에 충렬사란 사액이 내려지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충절을 기리고 선비를 가르치기 위해서 규모를 서원으로 확장하고 강당과 동서재를 지어 안락서원이라 하였다. 충렬사 안락서원은 본래 사액서원으로 대원군의 서원철폐를 피해서 선열의 얼을 기리는 교육장으로 명맥을 유지하였다.
조선 후기 동래읍에는 시술재라는 서당이 있었다. 영조 8년(1732)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읍성을 쌓은 기념으로 읍성의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서 세웠다고 전한다. 옛 동래지방으로서 이밖에도 현 남구 남천동 구역인 대리에 서당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시대 때에도 10여 군데가 넘는 서당에서 많은 학동들을 길러낸 공식 통계가 보인다.

상업공간

18-19세기 동래지방의 시장은 크게 5곳으로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 동래읍성 관문 앞에 열린 읍내장은 2일과 7일에 열렸다. 좌수영 앞의 바닷가 쪽에 열린 좌수영장은 5일과 10일에 열렸다. 부산지 서문 밖에 열렸던 부산장은 4일과 9일에 열렸다. 사천면의 독지리에 열린 독지장과 사하면 평림리의 하단장도 기록에 전하는 시장이다. 수산물이 풍부하여 주요 거래 상품이었고, 소금, 곡물, 식기, 연죽, 돗자리 등이 거래 물품이었다.

교통시설

돌다리인 이섭교는 숙종 20년(1694)에 동래구 수안동에서 연산동으로 갈 때 건너야 하는 수영천에 놓인 다리로서 3개의 아치를 연결한 돌다리였다. 이 돌다리의 준공 이전에도 나무다리가 있었으나 쉽게 썩어 그때마다 고쳐 세우는 번거로움이 있어서 새로 세운 것이다. 다리는 없어지고 이를 기념한 이섭교비가 온천동 금강공원 안에 남아 있다. 개축 관련 기록과 각 면의 계에 관한 기록이 있어 매우 중요한 비석이다.
다음으로 정조 5년(1781)에 동래부 남문 밖에 있는 4군데의 나무다리를 돌다리로 고쳤는데 이 다리가 사처석교이다. 이 또한 사처석교비라는 기념비만 남아있다.
수영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재송포라는 포구가 있었는데 소나무 1만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그리고 해운포는 동쪽 10리 지점에 있었다. 그밖에 남천포, 석포, 감동포, 두모포, 개운포, 감포, 칠포, 포이포 등이 기록에 전한다.

통신시설

동래의 봉수대 가운데 일찍부터 기록에 보이는 동래현의 황령산 봉수대, 해운대의 간비오 봉수대, 동평현의 석성 봉수대이다. 황령산 봉수대는 해운포와 부산포가 한 눈에 바라다 보인다. 이 곳에서는 서쪽으로 구봉 봉수대, 동으로 간비오산 봉수대, 북쪽으로 계명봉 봉수대에 각각 연락하던 부산 봉수망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던 봉수대다. 임란 때에는 1592년 4월 14일 오전 6시 황령산 봉수대가 전쟁이 벌어졌다는 봉수를 올렸다. 다음으로 해운대의 주산인 장산에서 남쪽 동백섬으로 뻗어내린 산맥 중간에 간비오산이 있다. 이 봉수대는 북으로 기장현의 남산봉수에 응하고, 서로는 황령산 봉수에 응한다고 했다. 황령산 봉수대와 함께 부산에서 가장 오랜 봉수대이다. 해운대 뒷산에 위치하며, 당시 해운포 일대를 감시했던 곳이다. 그밖에 오해야항 봉수, 계명산 봉수, 구봉 봉수, 응봉 봉수, 석성 봉수 등이 기록에 남아 있다.

민속공간

동래구에 전해지는 민속굿으로 동해안 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 제82의 가호)은 중요한 행사였다. 해안가를 돌며 별신굿을 도는 행사가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또한 <고지도>에 따르면 성의 동쪽 2리 증산 아래에 성황사가 있었다.

거주공간

<동래부사순절도>와 고지도를 보면 민가 거주 지역이 읍성의 동북방향을 제외하고 모두 나타난다. 그리고 북문과 서문을 나가서 성밖에도 마을이 형성되었고, 남문 밖에는 위아래에 민가들이 집중 거주하였다. 그리고 온천천과 수영강변에서 좁고 길게 경작지가 형성되고 이 주변에 민가와 반가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