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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동래부_해안형

소개
개요

고을 명칭 : 동래부(장산국, 거칠산국, 내산국, 동래현)
고을 주소 : 부산시 동래구 일대
재현 기준 : 1740년(조선 영조 16) <<동래부지>> 기록 참조.
축성 년도 : 삼한시대 성읍국가 시절 창건 추정, 조선시대 크게 개축
성곽 형태 : 평산성(북쪽 산성과 남쪽 평지성 결합)
축성 재료 : 석축
고을 입지 : 금정산 등 주변 산들 사이의 분지 지형
관아 배치 : 동헌 - 객사. 별도의 좌수영. 군사기관 다수 배치.
성문 개수 : 서문(심성루), 동문(지희루), 남문(무우루), 북문
성곽 시설 : 옹성, 동장대, 서장대 등 방어시설
고을 기능 : 국방과 외교의 중심지

위치

동래는 예로부터 현 부산지역의 내륙 중심지에 자리 잡고 있는 국방과 외교의 중심지였다. 부산 전체에서 동쪽의 언덕지대에 속한다. 이 동쪽의 언덕 지역 가운데 온천과 수영강에 의해 생겨난 침식분지이다. 북쪽에는 금정산맥의 봉우리들이 남서 방향으로 뻗어 있고, 한 단계 낮은 구월산과 그 산등성이가 동남으로 뻗어 있으며, 남쪽에는 금련산맥의 주봉인 황령산과 금련산이 자리 잡고 있다. 크고 작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지만, 온천천과 수영강이 합류하여 흘러드는 남쪽이 바다인 수영만으로 열려 있다.

역사

동래는 지금부터 2천여 년 전의 장산국(거칠산국, 내산국)에서 비롯되어 신라의 동래군, 고려의 동래현, 조선의 동래진과 동래부로 불려진 곳이다. 대일외교 및 국방거점으로 남부의 행정,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특히 조선 건국 이후 동래는 한반도의 남쪽 관문으로 1397년(태조 6)에 부산진이 설치되어 군사적인 요충지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왜국과의 관계에서 동래의 군사적인 중요성이 커지자, 부산진을 관할하는 동래군이 독립되었다. 1443년 왜와 계해약조를 체결하여 삼포가 개항되어 왜관과의 거리를 두기 위해 진영을 동래현으로 옮기고 군사적인 임무를 관할하게 하였다. 이와 함께 부산은 좌수사영을 두어 수군의 중요한 거점으로 떠올랐다. 따라서 동래를 중심으로 하는 부산지역은 동래현을 중심으로 한 행정중심지와 좌수사영을 중심으로 한 군사중심지로 이원적인 체제를 유지하였다. 그 뒤 삼포왜란을 겪으며 왜구의 침탈이 심각해지자 명종 2년(1557)에 군사권을 관할하는 동래현을 동래도호부로 승격하였다. 잠시 동래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599년 외교상의 중요성으로 인하여 다시 동래부로 승격되어 조선 후기까지 발전하였다.

특징

신숙주가 동래는 “땅이 바다에 인접해 있어서 대마도와 가장 가깝다”고 한 해안가에 형성된 국경 고을이다. 그리고 이첨이 동남제일현이라고 부를 정도로 크고 중요한 도시이다. 바다를 바라보면서 사방의 산 위에 봉수대를 거느린 방어형 읍성과 그 앞에 펼쳐진 포구를 중심으로 한 해안형의 특징을 동시에 갖고 있다.

동래는 임진왜란, 삼포왜란 등 왜국과의 전쟁이 잦았던 곳이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읍성의 동북쪽을 허물고 침입한 왜구와 끝까지 항전하다 몰사한 동래성전투는 고대적인 공성전의 전형을 보여준다. 남문 문루에서 전투를 독려하는 부사 송상현과 객사에 앉아 있는 비겁하고 나약한 병사 이각을 대비시키는 <동래부순절도>의 부감 장면은 당시의 긴박했던 전투상황 뿐만 아니라 동래읍성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