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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낙안읍성_읍성형2

소개
개요

마을 명칭 : 낙안읍성(옛 이름은 파지성, 분차, 분사, 분령군)
소재 주소 : 전남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 서내리, 남내리
지정 번호 : 사적 302호 (1983. 06. 14.)
축성 년도 : 축조연대 미상
성곽 둘레 : 1,410미터
성곽 높이 : 높이 4미터, 너비 3-4미터
성곽 면적 : 67,490평 (성내 41,018평, 성밖 보호구역 26,472평)
성곽 형태 : 장방형
축성 재료 : 석축(안팎을 모두 석축으로 쌓여 있는 협축 방식)
읍성 입지 : 평지성(평야 지대에 세워진 읍성)
관아 배치 : 동헌(왼쪽) - 객사(오른쪽) 배치 특징
성문 개수 : 남문, 동문, 서문 세 곳. 북문 없음.
성곽 시설 : 성벽과 옹성 3곳, 남문과 동문 사이에 치성 4곳(본래 6곳)
우물 연못 : 남문 앞의 옹달샘, 동내리의 통샘
읍성 기능 : 행정 및 군사 기능 혼합

위치

낙안이라는 지명은 ‘땅이 기름져 먹을 것이 넉넉하고 굶는 이가 없으니 온 백성들이 편안하다’는 뜻의 ‘낙토민안(樂土民安)’과 ‘백성이 넉넉하여 송사가 적어서 벼슬아치가 즐겁고 백성들은 편안하다’는 뜻의 ‘관락민안(官樂民安)’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낙안읍성은 전라남도 광주에서 약 77킬로미터, 순천에서 약 35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고 남해 방향으로 벌교와 인접하여 있다. 북쪽의 금전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동쪽의 오봉산과 서쪽의 백이산 그리고 동남쪽의 제석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남쪽으로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는 곳과 바다로 이어지는 곳 사이에 위치한 읍성이다.

역사

낙안은 본래 마한의 땅으로, 백제 때 고을 이름은 파지성인데 분차 또는 분사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신라 경덕왕 때 분령군으로 고쳤고, 고려 태조 23년(940)에 낙안으로 고쳐서 나주에 배속하였다. 1172년에 감무를 두었고 그 후에 군으로 승격되었다. 고려 후기부터 왜구가 자주 침입하자, 조선 태조 6년(1397)이 고장 출신 절제사 김빈길이 흙으로 읍성을 쌓았다. <<세종실록>>에는 1424년 9월부터 토축의 읍성을 석축으로 쌓으면서 본래보다 넓혀서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뒤 1626년(인조 4)부터 6년까지 낙안군수로 재임했던 임경업 장군이 고쳐 쌓은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낙안읍성은 특히 임경업 장군에 대한 전설이 곳곳에 배어 있다. 특히 성곽은 그가 15세 때 축지법으로 하룻밤에 쌓았다는 전설이 있으나, <<동국여지승람>>에 낙안성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임경업 축조설은 믿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경업 장군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은 다른 읍성의 주민들이 돌을 빼내 가는 바람에 많이 무너진 것에 비하면, 낙안읍성이 옛 모습을 지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낙안읍성은 왜구를 막는 군사기능을 위해서 세워졌으므로 수많은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임진왜란 중에는 군수와 군사들이 관아를 비우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따라 해전에 참가했는데, 그 사이 일부 백성들이 관아를 습격하여 노비 문서를 불태웠다고 한다. 또한 정유재란 중에는 퇴각하던 왜군들이 낙안 부근에 집결하여 목책을 치고 장기전을 펼쳤는데, 많은 민가가 불타고 주민들이 피란길에 올라 읍성이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고 한다.
동학 농민혁명 때에도 고흥, 보성, 순천 일대의 동학군들이 이 곳에 모여서 큰 피해를 남겼다. 읍성을 점령한 동학군은 이교청에 들어가 평소에 농민들을 수탈하던 아전들을 징계하였다. 수많은 집이 불탔고, 많은 소와 재물이 징발되었다.

특징

읍성은 산성처럼 평소에 비어 있는 곳이 아니다. 전투와 행정을 함께 수행할 목적으로 평소에는 관아를 중심으로 백성들이 모여 살았다. 유사시, 전쟁이 벌어지면 성밖의 백성들까지도 성안으로 들어가거나 산성으로 이동하여 함께 싸웠다. 사방에서 물밀 듯 밀려드는 적과 싸우는 전투장면의 설정이 가능하다.

낙안읍성은 다른 읍성과 달리 완전히 평야에 세워진 읍성이다. 성벽 안팎에 민가가 뒤섞여 있는 특이한 모습을 보여준다. 카메라가 평지의 성벽을 따라 가다가 민가나 고샅으로 오르내리는 층계를 비추는 광경이 매우 아름답다. 고샅을 걷다가 층계를 만나면 성벽에 올라갈 수 있는데, 성벽 위에서 보는 읍성은 초가집과 오래된 나무들로 가득 차 있어 조선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온 느낌을 준다. 용인민속촌, 제주민속마을 같이 전시용이나 안동하회마을과 같이 양반마을도 아니다. 대다수 서민의 삶을 지켜온 주민들이 조선시대의 세시풍속과 통과의례를 지키면서 실제로 생활하고 있는 유일하게 살아 있는 읍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