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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지형별 전통건축>양동마을_평야형>다스리기/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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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마을_평야형

다스리기/살아가기
교육공간

서원으로는 경산서원이 있다. 조선 헌종 때 창건한 서원으로 회재 이언적의 후손인 이의윤을 배향하고 학도들을 길러온 곳으로 400여 년을 이어왔다. 1970년 안계댐이 건설되면서 안계리에서 양동리로 옮겨지었다. 양동마을에서 떨어져 있지만 인근에 여강 이씨의 옥산서원(주향 회재선생)과 월성 손씨의 동강서원(주향 우재선생)이 있다. 서당의 역할을 한 곳이 3곳이 있다. 강학당(중요민속자료 제83호)은 조선 고종 4년(1867) 경에 세운 이씨 문중의 서당인데 심수정(중요민속자료 제81호)도 이씨 문중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던 서당이다. 이밖에 손씨 문중이 세운 안락당(중요민속자료 제82호)은 조선 정조 4년(1780)에 건립한 서당이다.

교통시설

조선시대에는 안락천을 따라서 나룻배가 오갔던 것으로 보인다. 지형을 살펴보면 마을 입구 진입로와 안락천이 만나는 지점에 나루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민속공간

양동은 유교의 양반풍속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어 민속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성황당도 없다. 마을 공동제사인 동제는 지내지 않지만 성격이 유사한 줄다리기를 행한다. 거릿말 중간에 당목이 있었고 이를 기준으로 윗말과 아랫말이 편을 가르고 줄다리기를 한다. 윗말은 서백당 앞의 은행나무에서, 아랫말은 관가정 앞의 은행나무에서 각기 고사를 지낸다. 줄다리기는 풍요와 무사를 비는 민속놀이다.
또한 안골과 거림골이 갈라지는 곳에 상여각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죽음의 공간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신성한 공간으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월성 손씨의 선조 묘소는 양동을 중심으로 반경 12킬로미터 내에 집중되어 있다. 가장 멀리 떨어진 묘소라도 이웃한 영천군과 영일군의 경계를 넘지 않는다. 그러나 타 성씨의 경우는 경상북도 전역과 경상남도까지 넓게 분포한다.

거주공간

마을 거주지는 크게 물자형 능선을 따라 4개의 골짜기에 형성되었다. 안골(내곡), 물봉골, 거림, 장터골의 4개 지역과 물봉동산과 수졸당 뒷 동산의 두 산등성이, 그리고 물봉골을 넘어 갈구덕(갈곡)으로 마을이 구성되어 있다. 물자의 가운데 능선을 중심으로 아랫말과 윗말로 나눠지며, 마을 입구에서 안계로 넘어가는 주도로를 중심으로 북촌과 남촌으로 나뉜다. 각각의 지역에는 양반집 바로 아래쪽에 3-5호씩 배치된 가립집이라는 초가집이 있었는데 대부분 양반가의 일을 도와주는 외거노비가 살았다. 그리고 안강들에 별도로 형성된 들마을(섬마을)에는 양반 소유 농토를 경작하는 소작인들이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