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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지형별 전통건축>하회마을_풍수형>다스리기/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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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_풍수형

다스리기/살아가기
교육공간

관아가 없는 자연 동성마을이므로 공립 교육기관인 향교도 없다. 하회를 대표하는 교육기관은 제일 먼저 병산서원을 꼽을 수 있다. 이 서원은 풍산 유씨들이 후진 양성을 위해서 설립한 풍악서당에서 출발하였다. 복례문을 지나면 장대한 누마루를 보여주는 만대루가 우뚝 서 있다. 동서재와 입교당 등이 자리한 교육공간을 지나면 서애 유성룡의 위패를 모신 존덕사가 자리잡고 있다. 병산서원과 함께 하회의 교육을 담당한 곳이 화천서당이다. 겸암 유운룡의 위패를 모셨던 화천서원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격하되어 서당이 된 곳이다. 서당의 역할을 했던 곳으로는 겸암정사가 있다. 겸암 유운룡이 학문연구와 제자양성을 위해서 설립한 곳이다.

상업공간

하회마을의 종가에는 풍산들녘 등 다른 곳의 농지에서 나오는 소작료가 해마다 집결하였다. 그러나 하회마을이 경제활동의 중심지는 아니었다. 따라서 시장이 서는 곳은 구담뿐이었으나 구담까지의 교통이 불편하여 중리나 풍산장을 이용하였다. 중리나 풍산에 장이 설 때마다 많은 장사치들이 하회마을을 들렀다. 양반가의 여인들이 출입이 쉽지 않을 때는 소식을 전하는 우체부 역할도 겸하였다고 한다.

교통시설

하회에서 나루터는 3곳에 보인다. 부용대와 하회마을을 오고가는 만송정 아래 백사장의 나루터, 화천이 굽이쳐 내려가는 광덕으로 내려가는 서쪽 나루터, 병산서원 앞을 오가는 나루터가 그곳이다. 병산서원 앞의 나루터 자리와 남산 방향의 앞내에는 겨울에 물이 줄면 흙다리가 놓였다고 한다.

민속공간

하회는 유교 전통이 살아 있는 양반촌이면서도 토착 민속 전통이 잘 살아 있는 마을이다. 이전부터 전승되었던 동제와 별신굿, 가신 신앙 등 민속 전통들이 풍부하게 살아 있다. 먼저 하회에는 동신을 모시는 당이 5개나 될 정도로 많다. 가장 중요한 당이 화산 중턱에 위치한 상당인 서낭당과 화산 자락의 묘지와 논 사이에 자리한 하당인 국시당(국사당)이 서낭당의 형태로 남아 있다. 그리고 마을의 상징적인 중심인 삼신당 자리에는 수령 600년 된 느티나무가 남아 있다. 나머지 두 당은 마을로 통하는 큰 고개와 작은 고개에 있는 누석단으로 골맥이신을 모시고 있다. 특히 삼신당은 수령 600년 이상된 느티나무로 마을의 중심 자리에 위치하여 별신굿이나 마을 제사 등 행사의 중심으로서 매우 중요한 장소이다. 주 도로에서 샛길로 돌아 들어가게 되어 은밀한 곳에 신성시하여 일반인들의 출입이 쉽지 않다.

거주공간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유씨 배판에”라는 하회에 전하는 말은 김해 허씨가 터를 닦아 놓으니 그 위에다가 광주 안씨가 집을 짓고 풍산 유씨는 안씨 집 앞에서 잔치판을 벌렸다는 뜻이다. 허씨가 화산 기슭의 하회 안쪽 거묵실골에 제일 먼저 자리 잡았고, 다음으로 안씨가 장안사의 탑골을 피해서 북서쪽 기슭에 자리잡았으며, 가장 나중에 들어온 유씨가 하회의 중앙에 자리 잡았다. 조선 후기에는 완전히 풍산 유씨의 동성마을 성격을 확립하여 양진당, 충효당, 북촌댁, 남촌댁을 중심으로 하는 하회의 중심부에 상류주택지역이 형성되고, 그 주변을 빙 둘러서 서민주택지역이 형성된다. 그리고 만송정 주변이 마을 사람들의 휴식 공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