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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지형별 전통건축>낙안읍성_읍성형2>다스리기/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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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_읍성형2

다스리기/살아가기
행정공간

낙안읍성 내부의 도로는 丁자 구조인데, 도로 위쪽에 객사와 동헌을 비롯해 관아들이 남향해서 들어섰다. 현재 1450년에 중건했다는 기록이 전하는 객사(지방유형문화재 제170호)가 온전히 남아 있다. 사무당이라 부르는 동헌과 사택인 내아가 옛 자리에 복원되어 있다. 그밖에 동헌의 외삼문인 낙민루, 객사의 외삼문인 빙허루, 죄인을 수용한 옥사 등의 시설이 있었다.

교육공간

대성전, 동서무, 명륜당 등 9채나 되는 건물이 들어선 향교가 보존되어 있다. 고지도 <낙안군지도>에 따르면 읍성의 동문으로 나가서 동남방향에 교촌이 있고 이 곳에 향교가 큰 규모로 서 있다. 입구 마당엔 역대 군수들의 비석들이 서 있어 비석거리를 이루고 있다. 향교 뒤뜰에는 500살이 넘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우뚝 서 있다. 읍성 안의 서내리 민가지역에 서당이 있어서 <<천자문>> 읽는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상업공간

고지도 <낙안군지도>에 따르면 객사 앞에 큰 읍내시장이 섰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동문에서 서문으로 이어지는 길과 남문에서 오는 길이 만나는 곳이다. 사람들이 가장 모이기 쉬운 곳이며, 읍성 한가운데이기도 하다. 지금도 이곳에 서 있는 은행나무 주위에 주막이 몇 군데 있는데, 이 곳 주변에 난전을 벌렸다고 한다. 읍성 밖으로는 고읍면에 별교장 저자와 남하면에 장좌장 저자가 섰다는 기록도 보인다.

교통시설

돌다리는 동문 앞에 널다리 형태의 작은 평석교가 있다. 해자 위에 장대석을 가로질러 놓고 돌판을 맞춰 끼운 다리이다. 예전에는 정월 대보름 날 자기 나이대로 이 다리를 건너면 일년 내내 다리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고 해서 다리밟기를 하던 곳이다. 그리고 옛날 낙안군에 소속되어 있다 보성군에 소속된 벌교읍의 홍교는 조계산 선암사 승선교와 함께 무지개다리인 홍예교로 보물 제304호로 지정된 뛰어난 다리이다. 그리고 큰 하천이 없어서 나루터는 발달하지 않았고 벌교 방향으로 내려가 순천만의 바다와 만나는 곳에 선박을 만드는 선소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통신시설

조선시대 낙안군 소속의 봉수로는 개운산봉수대가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국여지>> 등의 기록에 따르면 개운산에서 왜구의 침입을 남쪽 흥양의 팔전산 봉수에 전달하던 제5거 간봉이었다. 그런데 1759년 이전에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민속공간

민속과 관련된 요소들은 읍성 주변에 널리 퍼져 있다. 고지도에 따르면 읍성 서북쪽 3리쯤 떨어진 곳의 산기슭에 성황단이 있었다. 동문 입구에는 길을 알려주고 성을 지키는 장승(벅수)과 솟대(짐대)가 서 있었다. 예전에는 이 곳에 벅수들이 즐비하게 서 있어 ‘벅수 거리’라고 했으며, 해마다 정월이면 훼손된 벅수를 새로 깍아 세우고 장승제를 지냈다. 동내리의 상당은 객사 뒤쪽 성벽의 큰 느티나무이고, 중당은 임경업 장군 선정비각이며, 하당은 남쪽 성벽 안 미나리꽝(미나리를 심어 가꾼 논) 옆에 있다. 그런데 주민들은 임경업 장군을 존경하여 상당보다 중당에서 먼저 제를 올렸다. 동내리는 정월 대보름날에 당산제를 모시고, 서내리는 정월 초이튿날, 남내리는 초사흗날 당산제를 모셨다.

거주공간

3-4칸 정도의 작은 규모의 남부형 초가집들이 성 내외에 걸쳐 자리하고 있다. 관아 건물을 제외하고는 기와집이 한 채도 없는 것이 이 마을의 특징이다. 읍성 북쪽을 제외하고 丁자형 큰 도로를 따라 민가가 형성되었으며 출입문에 따라 동내리, 서내리, 남내리 세 마을로 이루어졌다. 현재 성벽 안팎에 민가가 들어서 성벽이 마을의 일부처럼 되어 있다. 사대부들이 거주하는 반촌은 동남방향의 평야지대를 끼고 넓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