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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양동마을_평야형

소개
개요

마을 명칭 : 월성양동마을
소재 주소 :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지정 번호 : 중요민속자료 189호(1984.12.24.)
성립 년도 : 고려 말기 이후 여강 이씨와 월성 손씨 이성 마을
마을 면적 : 969,430제곱미터
마을 입지 : 설창산 자락에 형성된 물자형 계곡
풍수 지리 : 물자형 풍수지리

위치

양동마을은 행정구역상 월성군 강동면 양동리에 속하며, 경주와 포항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포항과 안강을 잇는 큰 길 오른쪽에 자리한 이 마을의 이웃마을로 인동리와 안계리가 있다. 월성 손씨와 여가 이씨의 두 성의 동성마을이다. 조선시대까지 양좌동이라는 하나의 행정구역에 속하는 자연촌락이었다. 포항과 안강 사이의 길가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길가에서도 그 일부만 보일 뿐으로 외적의 침입을 피하기 쉬운 경관구조를 갖고 있다. 오래도록 전통마을의 고유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를 여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역사

양동마을에 언제부터 마을이 세워졌는지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최근 청동기시대의 묘제도인 석관묘가 마을의 안산인 성주산 정상의 언덕에서 백여 기나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양동마을에는 기원전 4세기 이전에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이웃 마을 안계리에 고분군이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미 삼국시대인 4-5세기경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족장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라시대에 아산 장씨가 처음 마을을 만들어 5-6호가 살면서 양좌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여러 가지를 종합해 보면 양동마을은 문화권으로는 경주문화의 변경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고려시대에서 조선 초기까지 오씨와 아산 장씨가 작은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나 확인할 만한 자료는 없다.
양동마을은 ‘외손의 마을’이라고 할 정도로 외손에 의해서 계속 가산과 종족을 유지하는 전통을 갖고 있다. 여강 이씨인 이광호가 이 마을에 거주하였고, 그의 손주사위가 된 풍덕 유씨 유복하가 처가에 들어와 살았다. 이어서 이 마을의 입향조라 일컫는 월성 손씨인 양민공 손소가 540여 년 전 유복하의 무남독녀와 결혼한 후 양동으로 이주하여 처가의 재산을 이어받아 살다가 후에 공신이 되었다.
또한 이광호의 재종증손으로 성종의 총애를 받던 성균생원 찬성공 이번이 손소의 7남매 가운데 장녀와 결혼하여 영일에서 이곳으로 옮겨와서 살았다. 이들의 맏아들인 문원공 회재 이언적이 배출되면서 손씨와 이씨 두 씨족이 오늘날의 양동마을을 이루었다.

특징

500여 년의 전통의 향기를 품은 160여 호의 옛 기와집과 초가집이 우거진 숲과 함께 펼쳐진 조선시대의 전통마을이다. 마을의 진입로 쪽은 경사가 급한 산으로 시선이 차단되고, 골짜기 밖에서는 마을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아 마을 입구에서는 그 규모를 짐작하기 어렵고, 고가들도 가까이 다가가야만 볼 수 있다.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는 방향에서 조선시대 양반마을, 즉 반촌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는 여러 가지로 경쟁적 관계이다. 주거 건축에서도 서로 경쟁하며 뛰어난 기와집을 많이 지었다. 경쟁을 통해서 특이한 형태의 건축물을 많이 지었고, 기와집 주변에 세워진 노비들의 가립집이라는 초가삼간집과 함께 양동마을만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