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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시설
이완장군묘
- 이완장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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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장군묘
- 일반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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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의 꿈이 서려 있는 호국 묘소
조선 중기의 무신인 매죽헌 이완장군의 묘소이다. 이완장군은 인조 2년(1624) 무과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으며, 평안도 병마절도사, 함경도 병마절도사, 경기도 수군절도사 등의 자리를 역임하였다. 1649년 효종이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던 치욕을 씻기 위해 북벌 정책을 계획할 때 어영대장, 훈련대장으로 발탁되었고 이어 훈련대장과 병조판서의 임무를 맡았다. 당시 제주도에 표류했던 네덜란드인 하멜을 시켜 신무기를 만들게 하였으며, 성곽의 개조와 신축 등을 추진해 나갔다. 효종이 재위 10년 만에 승하하자 북벌 계획이 중지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사대부 묘역의 모든 요소를 갖춘 묘소
묘역은 봉분을 중심으로 둘레에 돌담이 둘러져 있고 봉분 앞에는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드리기 위한 상석과 향로석, 장명등(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다. 묘역의 좌우에는 문인석, 망주석, 동자석이 각각 1쌍씩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다. 현재 동자석 1쌍과 장명등은 보이지 않는다. 조선시대 사대부 묘소가 갖추어야 할 요소를 대부분 잘 보존하고 있다.
- 전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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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北伐)의 혼이 담겨진 이완장군 묘소
조선 중기의 무신인 매죽헌(梅竹軒) 이완(1602-1674) 장군의 묘소이다. 묘소 주인인 이완장군은 인조 2년(1624) 무과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으며, 평안도 병마절도사, 함경도 병마절도사, 경기도 수군절도사 등의 자리를 역임하였다. 1649년 효종이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던 치욕을 씻기 위해 북벌 정책을 계획할 때 어영대장, 훈련대장으로 발탁되었고 이어 훈련대장과 병조판서의 임무를 맡았다. 당시 제주도에 표류했던 네덜란드인 하멜을 시켜 신무기를 만들게 하였으며, 성곽의 개조와 신축 등을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효종이 재위 10년 만에 승하하자 북벌 계획이 중지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현종 때에는 수어사로 임명되었고, 포도대장을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묘역은 봉분을 중심으로 둘레에 돌담이 둘러져 있고 봉분 앞에는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드리기 위한 상석과 향로석, 장명등(長明燈, 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다. 묘역의 좌우에는 문인석, 망주석, 동자석이 각각 1쌍씩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신도비(神道碑,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다. 현재 동자석 1쌍과 장명등은 보이지 않는다.
- 스토리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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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발견
인물 : 이완장군, 산적, 산적의 아내, 임금
배경 : 이완장군묘
줄거리
젊은 날 이완이 사냥길에 젊은 여자 혼자 있는 집에 들어 그녀와 통정을 하게 된다. 그녀의 남편이 돌아와 그 사실을 알고서 도저히 당하지 못할 완력으로 이완을 잡아 묶은 후 칼을 뽑아 찔러 죽이려 하지만, 아무리 힘을 줘도 팔이 마비된 듯 꼼짝을 하지 않는다. 장차 크게 나라를 섬길 인물인지라 이적이 일어난 것이다. 놀란 산적은 큰 절을 하며 자신의 아내를 이완에게 바친다. 나중에 이완이 중용되었을 때 그를 불러 궁궐 후문장에 임명했는데, 이완을 보좌해 나라의 많은 어려움들을 해결한다.
이야기 자료
<자료1>
<<조선왕조실록>> 인조 047 24/01/18(병인) / 통제사 이완이 쌀 1만 석을 경강에 실어다 놓고 치계하다
통제사 이완이 쌀 1만 석을 경강에 실어다 놓고 치계하다,
통제사(統制使) 이완(李浣)이 쌀 1만 석을 경강(京江)에다 실어다 놓고 치계했다.
“서울에는 기근이 바야흐로 심각한데 본영(本營)에는 저축된 쌀이 자못 넉넉합니다. 쌀을 베와 바꿀 때에 비록 값을 낮추어 판매한다 하더라도 본영은 이익을 얻을 수 있고 도성 백성들은 지탱하여 살 수 있습니다. 비국으로 하여금 상의해 결정하고 지휘하도록 하소서”
이에 대해 비국이 아뢰기를, “피차가 모두 유익하고 공사(公私)가 둘 다 편리합니다.”고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자료2>
<<조선왕조실록>> 효종 007 02/10/20(갑자) / 사헌부가 이완의 탈법을 문제삼아 추고할 것을 청하다.
대사헌 조석윤(趙錫胤), 집의 서상리(徐祥履)가 아뢰었다.
“행호군(行護軍) 이완은 한때의 이름난 무인으로 조정에 의해 특별히 중용되었으니 더욱 스스로 감격하여 삼가고 신중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집을 법을 어기고 웅대하게 지어 여염에까지 확장하였으며, 심지어는 근처의 집터를 침탈하였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신들이 송사를 제기한 사람의 소장(訴狀)을 보니, 그 곡절을 아주 상세히 말했습니다. 한편의 말을 다 믿기는 어렵지만 해당 부서의 문서를 가져다 살펴보니, 원통하다고 말한 것이 역시 명백한 듯했습니다. 국법은 지극히 엄한 것이고 여론은 두려운 것입니다. 만약 강한 자로 하여금 약한 자를 침범하게 하고 귀한 자로 하여금 천한 자를 능멸케 한다면 사들이 어떻게 수족을 움직이겠습니까. 그의 탐욕스럽고 방자하며 거리낌 없는 태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완을 파직하고 기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당시에 송사를 판결한 관원 역시 사사로움을 따르고 법을 잘못 적용한 잘못이 있으니, 해당 부서의 당상과 낭청의 직책에 있었던 자의 책임을 엄중하게 물으시기 바랍니다.”
임금이 대답했다.
“먼저 책임을 추궁하지는 말고 다른 부서로 하여금 재조사를 하게 한 뒤에 처리하라.”
<자료3>
<<조선왕조실록>> 효종 017 07/10/04(무인) / 군졸들의 방패 사용에 대해 이르다
왕이 주강에 나아가 <<시전(詩傳)>> <하인사장(何人斯章)>을 강독하였다. 강독을 마치자 임금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의 군졸은 갑옷을 입지 않아 갑자기 적을 만나면 화살과 돌을 막기 어렵다. 나무 방패를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
훈련대장 이완이 아뢰었다.
“나무 방패는 가지고 다니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신은 군인들이 각기 하나의 큰 무명 자루를 소지하였다가 급박할 때에 임해서는 흙을 담아 쳐들어오는 형세를 방어한다면 나무 방패보다 못하지 않을 것으로 여깁니다.”
임금이 다시 말했다.
“그렇다. 일찍이 들으니 명나라 장수 장춘(張椿)의 군대가 무명 자루를 소지하였다가 넓은 들판에서 오랑캐의 기마를 만나면 흙을 자루에다 넣어 보루를 만들었는데 오랑캐 군사가 감히 핍박하지 못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