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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안동도호부_강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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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실 _서지재사
재실 _서지재사

중요민속자료 182호, 안동시 와룡면 위치. 학봉 김성일의 묘제사를 위한 제사건물

일반정보

의성 김씨 문중의 영원한 안식처



서지재사는 학봉 김성일의 묘제사를 치르기 위해서 건설된 제사시설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진 김성일의 비석에 적힌 연도인 1634년(인조 12) 이후에 세워진 건물로 볼 수 있다. 김성일은 유성룡과 함께 이황의 학맥을 이은 양대 거두이다. 임진왜란 때 종군하던 중 1593년 병으로 사망하여 지리산에 가매장하였다가 12월 현재의 묘소로 안장하였다. 서지재사는 안동 시내에서는 약 4킬로미터 떨어진 와룡면 서지리 가수내마을 김성일의 묘소가 있는 산 아래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서북향을 이루고 있다.



안동의 ‘뜰집’ 형태를 그대로 이어받은 재사



전체 형식은 안동의 대표적인 주거형식인 ‘뜰집’의 구성을 따랐다. 3X3칸의 안마당을 중심으로 완전한 口자형 건물을 계획하여 5X5칸의 규칙적인 구조골격을 만든다. 건물 가운데를 3칸의 대청으로 개방하고 양쪽 날개채는 모두 방으로 채운다. 여기까지는 완벽하게 뜰집의 구성과 일치하며, 지붕의 구성도 뜰집 그대로다. 누마루 아래 가운데 문을 들어서면 3칸 마당에 이르게 되며, 앞면에는 대청마루가 있다. 집의 앞면은 2층으로 아래에는 광, 대문간, 외양간 등을 두고 위에는 누마루를 두었다. 이 누마루는 제사를 치른 뒤 음식이나 술을 마시는 음복석으로 사용하였고 몸채인 정침은 제수를 장만하는 데 쓰였다.

전문정보

학봉 김성일의 묘제사를 받드는 건물, 서지재사(西枝齋舍)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묘제(墓祭)를 위한 재사(齋舍)건물이다. 정확한 건축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재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진 김성일의 비석에 적힌 연도가 인조 12년(1634)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보다 늦은 1700년대의 건축으로 추정된다.

김성일은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川前里, 내앞마을)에 입향(入鄕)한 김만근(金萬謹)의 증손자로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이황(李滉)의 학맥을 이은 양대 거두이다. 1564년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으며 전적과 형조, 예조 좌랑을 거쳐 정언이 되었고, 인조 27년(1649)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임진왜란 때 종군하던 중 1593년 병으로 사망하여 지리산에 가매장하였다가 12월 현재의 묘소로 안장하였다. 문집으로는 <<학봉집(鶴峰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 자는 사순(士純)이다.

이 재사는 안동 시내에서는 약 4킬로미터 떨어진 와룡면 서지리 가수내마을 김성일의 묘소가 있는 산 아래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서북향(西北向)을 이루고 있다. 서지재사의 전체 형식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주거형 ‘뜰집’의 구성을 따랐다. 3X3칸의 안마당을 중심으로 완전한 口자형 건물을 계획하여 5X5칸의 규칙적인 구조골격을 만든다. 건물 가운데를 3칸의 대청으로 개방하고 양쪽 날개채는 모두 방으로 채운다. 여기까지는 완벽하게 뜰집의 구성과 일치하며, 지붕의 구성도 뜰집 그대로다.

정면 5칸, 측면 5칸의 口자형 평면구조 집으로 홑처마에 민도리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누마루 아래 가운데 문을 들어서면 3칸 마당에 이르게 되며, 앞면에는 대청마루가 있다. 집의 앞면은 2층으로 아래에는 광, 대문간, 외양간 등을 두고 위에는 누마루를 두었다. 이 누마루는 제사를 치른 뒤 음식이나 술을 마시는 음복석(飮福席)으로 사용하였고 몸채인 정침(正寢)은 제수를 장만하는 데 쓰였다.

묘소는 재사의 서쪽 낮은 산위에 있어 매우 가까운 위치다. 이른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명당에 자리잡은 묘소 앞으로는 씨족마을이 전개되며, 서지재사는 마을 앞 낮은 경사지에 서있다. 재사로는 드물게 접근성이 좋은 입지다.

내부 전면에는 누마루를 설치하여 2층이 되었고, 사랑채는 물론 없다. 누마루의 동쪽 칸에 노인방을 앉힘으로써 누마루는 서쪽으로 향하는 방향성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그 쪽이 김성일의 묘소가 있는 방향이다. 뜰집의 형식을 바탕으로 재실로서의 기능과 요소를 수용한 예다.

안채는 뒤쪽의 경사지를 이용해서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누마루 바닥보다 안마루의 바닥이 높다. 누 아래의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대청이 있으며, 대청 왼쪽으로 안방이 있는데 뒷방을 통해서 대청으로 직접 출입할 수 있다. 대청마루 왼쪽으로 뒷방, 안방, 부엌이 배치되어 있으며, 마당 쪽으로 나와 있는 안방은 뒷방을 통해서만 대청으로 드나들 수 있다. 오른쪽에는 2칸의 윗방과 마루방이 있고, 사랑방 2칸이 배열되어 있다. 앞채의 누마루는 정면과 왼쪽 옆면이 벽이며, 각 칸마다 중앙에 문이 있다. 또한 안대청에서 누마루까지는 난간을 세운 쪽마루가 연결되어 있다.

서지재사는 대청 오른쪽에 2칸으로 된 윗방과 마루방 1칸, 그리고 2칸 사랑방이 차례로 배열되어 있다. 사랑방은 앞채 누마루 옆면과 직각을 이루고 있고, 안대청 마루에서 누마루까지는 난간을 세운 쪽마루로 연결하였다.

유사방은 관리인방과 겸용하도록 되었고, 대청에 면한 방은 고방이다. 대청 동쪽에는 2칸 규모의 참제인방을 두어 원로들을 제외한 모든 참제인들이 거하는 곳이다. 종손방과 참제인방 사이에는 고방이 있고, 그 3개의 방 사이에 평난간이 달린 복도를 두어 연결한다. 평상시 출입구는 서쪽 부엌을 통하도록 되었고, 제례시 출입구는 전면 누마루 아래 중앙에 나있다. 누의 아래에는 모방과 외양간 창고 등을 두어 작업공간으로 사용했다.

서지재사는 전면에 누다락이 있는 口자형 재사건물의 일반적인 형식을 보이고 있으나 안대청을 누마루보다 더 높게 설치한 것이 특이하다. 부분적인 변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조선 후기 재사건축의 예로서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

이 집은 평소 관리인이 사용하기에 딱 맞을 정도로 재사 중에서는 작은 규모에 속한다. 유사방을 관리인방과 겸하게 하는 등 경제적 규모를 추구한 결과다. 최소 규모에 맞추어 공간의 쓰임새를 겹치도록 배분한 합리성과 절제성이 강하게 표출된다. 이미 교조적 단계에 들어선 조선 중기 성리학계의 전형적 공간구성의 수법을 보여준다.

서지재사의 공간구성은 대청은 유사가 관장하며, 누마루는 종손이 관장한다. 비슷한 크기의 누와 대청을 앞뒤로 평행하게 놓음으로써, 또 그사이 간격이 그다지 넓지 않음으로써, 둘 사이의 긴장감이 형성되어 대칭적인 안마당은 한층 더 공식적인 장소로 바뀌게 된다. 마당을 감싸는 툇마루와 계단식 통로가 자칫 경직되기 쉬운 안마당의 분위기를 이완시킨다. 다양한 요소들로, 그러나 매우 규칙적으로 구성된 순환통로는 제례를 위해 고안된 것들이다.

스토리가이드

주제 : 구출

인물 : 영남 유림 다수, 일본인 설계사 아라키(荒木)

배경 : 서지재사



줄거리

경제적 침탈과 함께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인들에게 보편적인 풍수관념을 이용해 정신과 기백을 빼앗는 정책을 실시했고, 그것은 도처에서 거센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1937년 조선 사대부의 기백과 독립투사의 충정이 어린 안동에서도 풍수를 의도적으로 훼손하려는 음모가 있었다. 막대한 추가비용과 공기 지연을 감수하고 안동시내를 관통하여,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의 종택인 임청각 앞과 학봉 김성일의 묘소를 지척으로 통과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이를 조선의 기맥을 끊고 학봉 김성일에 큰 불경을 짓는 것이라고 생각한 당시 유림들은 격렬히 반대했고, 마침내는 학봉 김성일 묘소를 관통하지 않고 우회하는 설계변경을 쟁취하게 된다.



이야기 자료

<자료1>

<한국의 명가명택 - 경북 안동 학봉 김성일(金誠一) 종택>(신동아, 2001년 12월호)



중앙선은 서울 청량리에서 경북 안동까지 이어지는 철도 노선이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중앙선 노선을 처음 설계할 때, 철로가 학봉의 묘소가 있는 안동시 와룡면 이하동 가수천을 관통하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설계대로라면 학봉 묘소의 내룡(來龍)이 끊어지게 된다. 풍수적인 가치관에서 볼 때 이는 학봉에 대한 엄청난 불경에 해당하는 사건이다.

이런 계획을 알게 된 학봉의 제자들과 후손을 포함한 영남 유림 수백 명이 들고 일어나 조선총독부에 진정서를 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설계를 맡았던 일본인 책임자 ‘아라키(荒木)’도 학봉이 영남에서 존경받는 큰 선비임을 알고 철도 노선을 수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학봉 묘소를 관통하지 않고 우회하도록 설계변경을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원래 계획에 없던 터널 5개를 새로 뚫어야 했다. 청량리에서 안동까지 기차를 타고 가다보면 유난히 터널을 많이 만나게 되는 것은 바로 학봉의 명성 때문이다.



<자료2>

<<조선왕조실록>> 선수 06/11/01(정축) / 밤에 비현각(丕顯閣)에 나아가 가까운 신하를 불러 책을 읽었다.



김성일(金誠一)이 아뢰었다.

“수령들이 한 사람도 국사를 책임지는 자가 없는데, 나라 살림과 민생의 상황에 대해서는 주상께서도 이미 아시는 바입니다. 이런 상태로 나간다면 앞으로 10년이 못가서 위망(危亡)의 화가 닥치고 말 것입니다. 조정의 명령은 막혀서 행해지지 않고 상하의 형세는 흩어져 계통이 없으므로, 경연 석상에서 비록 한두 가지 건의한 일이 있더라도 한 조목이 겨우 시행되면 또 다른 폐단이 따라서 생기니, 이러고서도 제대로 그 나라를 다스린 경우는 없습니다. 전하께서 마음을 올바르게 하여 기본 행실을 닦지 않으시면 한 나라의 인심을 어떻게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