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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건축물

행정시설
관아
관아

관아

일반정보

일제에 의해 참담하게 망가진 정치와 생활의 중심지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벼슬아치가 정무를 처리하는 곳을 관아 또는 공청이라고 했다. 관아의 주인인 수령은 다스리는 고을에 한해서 군사, 행정, 사법을 한 손에 쥐고 통치하였다. 관아 건축은 이러한 정치적 위계와 통치 기능을 반영하여 배치하였다. 지방의 모든 생활의 구심점인 관아는 일제시대에 들어서 집중적인 파괴의 대상이 되었다. 중심 건물인 동헌이나 객사는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헌병주재소로 쓰이거나 새로 들어선 관청 구석에 훼손된 채 방치되었다. 병영, 형옥, 향청 등은 철저하게 파괴하여 그 목재와 기와를 다른 관청을 짓는데 사용하고 그 터는 경작지로 개간되어 알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일곱 가지 기능을 갖춘 통치기관



지방 관아 가운데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는 곳은 바로 도에 설치된 감영이다. 원주감영의 동헌인 선화당은 수령이 직접 정무를 처리하는 동헌 건물이다. 단종의 유배지에 설치된 관풍헌은 왕의 위패를 모시며 국가권력이 지방에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객사 건물이다. 강릉에 있는 칠사당은 관아가 수행해야 하는 일곱 가지 주요 업무를 처리하던 건물이다. 강릉 객사문은 고려시대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 객사의 출입문이다. 관아에는 이밖에도 향청, 내아, 책방, 질청, 형방청, 장관청, 사령청, 교방, 관노청, 헐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문정보

지방의 행정과 생활의 중심지, 관아(官衙)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벼슬아치가 정무를 담당하는 곳을 관아(官衙) 또는 공청(公廳)이라고 했다. 관아는 국가, 정확히는 왕을 대신해서 성리학적 통치질서를 지방 백성들 사이에 뿌리내리게 하는 공식기관이다. 관아의 주인인 수령(守令)은 다스리는 고을에 한해서 군사, 행정, 사법을 한 손에 쥐고 통치하였다. 바로 이러한 통치질서가 관아 건축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무엇보다 정치적 위계를 중시 여겨 신분의 영역을 엄격히 구분하여 건물을 배치하였다. 관아는 고을의 생활과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관아의 위치에 따라 시장과 민가, 성곽이 배치되어, 전체 도시 계획의 중심이 된다.

지방의 모든 생활의 구심점인 관아는 일제시대에 들어서 집중적인 파괴의 대상이 되었다. 무엇보다 조선인들의 삶의 중심을 파괴하여 통합력을 잃게 만드는 것이었다. 중심 건물인 동헌(東軒)이나 객사(客舍)는 학교, 면사무소, 경찰서, 헌병주재소로 쓰이거나 새로 들어선 관청 구석에 훼손된 채 방치되었다. 군사력과 공권력을 상징하던 병영(兵營)이나 형옥(刑獄)은 철저하게 파괴하여 그 목재와 기와를 다른 관청을 짓는데 사용하여 그 터마저 알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밖에 향청, 작청, 교방청 등 수많은 부속 건물들과 문루들은 완전히 파괴한 뒤 그 자리를 싼 값에 불하하여 경작지로 개간시켰다. 결국 고지도나 고문헌에 나오는 모든 관아 조직을 한 군데에서 관찰할 수 있는 유적지가 없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지방 관아 가운데 가장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 바로 감영(監營)이다. 조선시대 감영급 건물 가운데 중요한 건물인 동헌, 객사, 객사문, 감옥을 각지에서 1종씩 뽑아서 조합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근대사의 상처 때문이다. 각 건물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자.



1) 선화당(宣化堂), 위풍 당당한 호령소리 들리던 원주감영(原州監營)의 동헌



<선화당>이란 “임금의 덕을 베풀어 백성을 교화한다(宣上德而化下民)”는 뜻의 현판이다. 각 도의 관찰사(觀察使)가 집무하는 정당(正堂)이며, 당헌(棠軒)이라고도 부른다. 감영은 감사가 집무하는 관아로서 순영(巡營)이라고도 하였다. 이 건물을 지금으로 말하면 도지사가 집정하는 도청본관인 셈이다.

선화당은 985년(고려 성종) 처음 지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초기 건물의 형태가 전해지지 않아 확실하지 않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조선 목종 때 원주목사 이후산(李後山)이 중건하였다고 한다. 문루(門樓)는 고려 충숙왕 때 건립하였는데, 1395년(태조 4) 선화당을 감영청사로 하면서 문루 역시 강원감영 문루로 쓰게 되었다. 6.25때 파손된 것을 보수 하였으며 선화당은 한동안 군청사로 사용하여 창문을 내는 등 개조되었다. 현재 강원감영 부속건물과 함께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八作)지붕이다. 내부는 4방향에 내진주를 세워 모두 툇간으로 달았다. 내진주의 좌측에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짝이 없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그 우측에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방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장마루가 깔려 있고 내부 중간에 미서기문을 달아 2개의 방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마루방은 전후, 좌우면에 띠살문을 달았으며 천장은 연등천정이다. 공포양식은 조선 후기 양식인 이익공 양식으로 초익공은 외부모습이 연화초각이 있는 앙설형이고, 이익공은 연봉이 있는 수설형으로 되어 있다.



2) 관풍헌(觀風軒), 성 안의 가장 신성한 곳에 자리 잡은 객사(客舍)



관풍헌은 관아 건물 중 객사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객사란 고려와 조선시대 때 각 고을에 두었던 관아 건물의 하나로 왕을 상징하는 나무패를 모셔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하는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였으며, 왕이 파견한 중앙관리나 사신들이 묵기도 하였다. 객사 건물은 일반적으로 가운데 정청(正廳)이 있고, 좌우에 동서익헌(東西翼軒)의 3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관풍헌 또한 이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중 동익헌에는 <관풍헌>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관풍헌의 배치는 정조 때 중수된 이후 현재 그 모습이 변하였다. <장릉사보(莊陵史補)>와 <월중도(越中圖)>에 전하는 관풍헌의 배치를 보면 외삼문(外三門)과 내삼문(內三門)이 따로 있으며 우측 익사(翼舍)와 중앙의 정청(正廳) 사이에 담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리고 관풍헌 앞쪽에 백운루(白雲樓)라는 문루(門樓)가 있었고, 그 앞으로 하마비(下馬碑)를 세운 모습이다. 지금은 정청(현재 약사전)과 좌익헌(법당), 우익헌(관풍헌) 3동의 건물과 자규루(子規樓), 외삼문(外三門) 하나와 자규루 좌측 협문(夾門)이 있을 뿐이다. 중수 당시의 모습보다 많이 축소되었다고 볼 수 있다.

관풍헌은 단종(端宗)이 유배되었던 곳에 세워진 객사이다. 단종이 죽임을 당하고 정식으로 조정에서 거론된 것은 1516년 중종 때의 일이었다. 이때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고, 분묘를 수축하라는 명이 내려졌으나 지속적인 관리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관풍헌이 중수된 시기는 정조 때 영월부사 박기정(朴基正)이 건의하여 중수하였다. 관풍헌의 중수기를 보면 관풍헌을 중수한 이후 주민들에 의해 더럽혀 질 것을 우려해 문을 봉쇄하여 5일에 한번씩 열어 본다는 기록이 있다.

관풍헌을 구성하는 3동의 건물 중 동익헌은 관풍헌의 현판이 붙어 있는 곳이다. 한단의 낮은 기단 위에 자연초석을 배치한 후,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5량집이며 지붕은 객사의 좌우 익사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로 좌측은 맞배, 우측은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평면형태를 살펴보면 정면 중앙칸 보다 서측 협칸이 2척 정도 더 주칸이 크게 되어 있으며, 좌측 툇칸 및 협칸을 제외한 나머지 주칸은 뚜렷한 차이가 없다. 공포는 익공계 건물로 외일출목 이익공집이며, 외진주에서의 쇠서형태는 초익공과 이익공 모두 익공의 끝이 아래로 향하는 수서형태이다. 관풍헌의 처마는 정면, 우측면, 배면 3면의 연목 위에 부연을 댄 겹처마이다.



3) 칠사당(七事堂), 관아의 일곱 가지 업무를 처리하는 행정공간



칠사당은 현재 강릉 시청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시대 관공서 건물로서 호적(戶籍), 농사(農事), 병무(兵務), 교육(敎育), 세금(稅金), 재판(裁判), 풍속(風俗) 등 일곱 가지 정사를 베풀었다하여 ‘칠사당’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칠사당이 관아 건물의 일부인 것만은 확실하나 그 기능에 대해서 명확히 서술하고 있는 것이 <<강원도지(江原道誌, 1959)>>에서 뿐이다. 이 기록에는 칠사당이 동헌이라 하고 있지만, 워낙 후대에 씌어진 책이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관동지(關東誌)>>에 실린 시제(時題)에 동헌과 칠사당을 따로 다루고 있어 칠사당이 동헌은 아니고 아전들의 집무실인 질청(秩廳)으로 추정된다.

칠사당은 조선시대 관아 건물로서 인조 10년(1632) 3월에 중건(重建)하고 영조 2년(1726)에 확장 중수(重修)하였다. 고종 3년(1866)에는 한 때 진위대의 청사로 쓰이다가 고종 4년(1867) 화재로 소실된 것을 부사 조명하(趙命夏)가 다시 중수하였다. 한편 일제시대 때는 일본 수비대가 사용하다 강릉 군수 관사로 사용하였고, 6.26때는 미국민사원조단(CACK)으로 사용된 적이 있다. 1958년 5월부터는 강릉시장 관사로 사용되어 오다가 1971년 12월 16일 지방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다. 당시까지 관사로 사용하면서 많은 변형이 생겨 1980년에 옛모습으로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칠사당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단층(單層) 팔작(八作)집이다. 본 건물은 전체적으로 35센티미터 정도의 낮은 기단 위에 원뿔대형 또는 원통형 등의 높이가 다른 초석 위에 흘림이 거의 없는 민두리 기둥을 세웠다. 6칸의 툇간은 좌측의 누마루를 세운 1칸을 포함하여 모두 7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칸넓이는 일정하지 않다. 가구는 전후 평주 익공 위에 대들보를 걸은 3익공양식으로서 겹처마를 하고 있다.

누각(樓閣) 부분은 바닥과 지붕이 별도로 되어 있어 마치 별개의 건물 같은 느낌을 주고 있는데, 현재로서는 별개의 계단이 연결되어 있지 않아 대청이나 온돌방에서 직접 오를 수 없게 되어 있다. 원래는 목제계단이 대청마루와 연결되어 있었으나 1980년의 개조 때 없어졌다고 한다.

대청(大廳)마루는 대청과 툇마루가 붙어 있는 형식이나 특이하게도 두 마루 사이에 기둥이 없어 경계가 불분명하다. 대청마루의 우물천정과 기둥 위에 단풍잎을 등에 단 물고기를 조각하여 장식한 부분이 특이하다.



4) 강릉객사문(江陵客舍門), 신성한 객사로 들어가는 출입문



고려시대에 지은 강릉 객사의 정문이다. 현재 객사 건물은 없어지고 문만 남아 있다. 객사문의 건립연대는 여러 의견이 있어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다. 다만, 건축적 특징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 후반의 건축물이라 추정하고 있다. 문루에 걸려 있는 ‘임영관(臨瀛館)’이란 현판은 공민왕(恭愍王)이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고, 일제시대에는 학교 건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학교가 헐린 뒤 1967년에 강릉 경찰서가 들어서게 되고 현재는 마당에 객사문만 남아 있다. 남산의 오성정, 금산의 월화정, 경포의 방해정은 객사의 일부를 옮겨 지은 것이다.

객사문은 앞면 3칸, 옆면 2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서 넣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柱心包) 양식의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앞면 3칸에는 커다란 판문(板門)을 달았으며, 기둥은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배흘림 형태이다.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세부건축 재료에서 보이는 세련된 조각 솜씨는 고려시대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각 지방의 관아가 서로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방의 지세나 역할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지방자치가 실시되면서 옛 관아를 복원하려는 시도가 여기저기 보인다. 그러나 허술한 지표 조사와 문헌 조사로 상관없는 곳에 건물을 몰아 지어 놓거나 서로 관계가 없는 건물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곳이 너무 많다. 문화재 복원과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일제가 저지른 잘못을 또 한번 우리 손으로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스토리가이드

주제 : 수수께끼

인물 : 안동부사 맹사성, 관아의 아전들

배경 : 안동 관아



줄거리

맹사성이 안동부사로 부임해 와서 보니 이상하게도 관아의 많은 아전들이 눈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다. 또 관아에 드나드는 백성들의 경우도 눈병 환자가 유난히 많았다. 마침 맹사성은 풍수지리에 밝았던 까닭에 안동지형을 유심히 살펴보니 안동의 지세가 눈병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는 지세였다. 그래서 당시 흥국사라는 절을 눈이 뜨인다는 의미의 개목사라 이름을 바꾸었으며, 그 후부터는 차츰 눈병환자가 없어졌다.



이야기 자료

<<한국구비문학대계>>2-6, <아랑의 원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옛날 밀양 원님의 딸 아랑이 있었는데, 원의 부하로 있던 사령이 강제로 욕을 뵈어 남천강 물에다 집어넣었다. 원님이 새로 부임해 올 때마다 원혼이 된 아랑이 나타나 억울한 사정을 아뢰려고 했지만 이를 본 고을 원이 놀라서 죽는 일이 되풀이 되었다. 마침 담이 큰 사람이 자원해 부임하고서 첫날 동헌에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 있었다. 한밤중이 되자 아랑의 원혼이 산발을 하고 죽은 당시의 처참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정신을 가다듬은 원이 호통을 치며 귀신인가 사람인가를 물으니, 네 번 절하고 앉아서 “소회를 아뢰려고 들어올 때마다 원님들이 돌아가셨다”며 자신의 소원을 풀어줄 것을 부탁했다. 원님이 범인을 어떻게 잡을 수 있는지를 묻자, 내일 아침 조회에 육방 아전들을 모으면 자신이 노랑나비가 되어서 범인 갓 꼭대기에 앉을 터이니 처단해 달라고 했다. 다음날 범인을 잡은 뒤 버려진 시체를 찾아보니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원님이 장사를 지내주었더니 그날 밤에 다시 나타나 감사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자료2>

<<조선왕조실록>>중종 028 12/5/27(신축) / 형부가 덕산현감 이형간의 처가 강상죄에 해당함을 들어 추국하도록 아뢰다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고, 헌부가 아뢰었다.

덕산(德山) 현감 이형간(李亨幹)의 처는 성질이 지극히 악하여 이형간을 항상 노예처럼 대하였습니다. 근자에 이형간이 명(命)을 받들고 나갔다가 찬바람을 쐬어 병을 얻어 관아로 돌아왔는데, 그 처가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이형간은 동헌에 누워서 땀을 내고자 하여 옷을 달라 하니, 그 처가 끝내 주지 않아 갑자기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고도 죽은 뒤에 역시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이는 강상에 관계되는 것이라 조옥(詔獄)으로써 추국하기를 청합니다.“

이에 왕이 다음과 같이 전교했다.

“이형간의 처는 지극히 완악하나, 양반 부녀이니 조옥에 내릴 것은 없다. 본부(本府)에서 추문하더라도 죄가 드러날 것이다. 나머지도 윤허하지 않는다.”



<자료3>

<<조선왕조실록>>중종 001 01/11/02(정축) / 관아의 수령이 혼인한 자식을 대동하여 임지로 가지 못하게 하다



왕이 다음과 같이 전교했다.

“각 관아의 수령들이 성혼한 자녀를 거느리고 갈 수 없는 것은 이미 법례(法例)가 있는데, 근래는 태만해져서 규찰하지 않으니, 금후로는 엄격히 금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