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한국국학진흥원

목조건축물

교육시설
도산서당
도산서당

도산서당

일반정보

퇴계 이황의 건축실험



조선 성리학의 대가 퇴계 이황이 도산 남쪽 기슭에 도산서당을 짓기로 결심한 것은 1557년의 일이다. 도산서당을 짓는 일은 용수사의 법연 스님이 맡아서 추진하였다. 도산서당은 현재 도산서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도산서당을 모태로 하여 제자들이 스승을 기리는 서원을 건설하였기 때문이다. 낙동강 상류의 굽이치는 언덕 한편을 차지하고 주변의 낮은 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 자연에 안겨 있는 느낌을 준다. 이황은 말년에 여기에서 제자들을 기르면서 보내게 된다. 스승이 거처하는 방과 학생들이 배우는 마루 공간을 결합한 서당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달개지붕을 달고 덧마루를 달아 교실을 넓힌 서당



3칸으로 이루어진 도산서당은 암서헌, 완락재,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쪽 끝 1칸은 다른 칸에 비해 아주 좁은 부엌으로 난방공간이다. 가운데 칸이 이황이 거주하는 완락재이다. 완락재의 동쪽 벽의 4짝 문을 열어 제치면 방과 마루가 하나의 공간이 된다. 암서헌은 완전히 대청으로 되어 있다. 후대에 동쪽 끝부분에 2미터 가량 처마를 더 달아 달개지붕으로 만들고, 그 아래에 마루를 깔아 덧붙였다. 암서헌의 남쪽, 도산서당의 좁은 안마당 동남쪽 끝에는 정우당이라 부르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다. 건너편 언덕에 절우사라 부르는 작은 화단이 있다. 방안에서 마루와 연못을 넘어서 건너편 화단으로 자연과 만난다.

전문정보

퇴계 이황이 세운 서당, 도산서당(陶山書堂)



도산서당은 현재 도산서원(陶山書院) 내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이 들어서기 전 이황(李滉)에 의해 손수 지어진 서당을 전신으로 하여 서원이 건립되어 있다. 낙동강 상류의 굽이치는 언덕 한편을 차지하고 주변의 낮은 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 자연에 안겨 있는 느낌을 준다.

도산서당의 주인공은 이황(1501-1570)이다. 우리에게 퇴계로 더 잘 알려진 이황은 지금의 안동시 예안면 온혜리에서 태어났다. 12세 때 숙부 이우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1523년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528년 진사, 153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급제 이후 이황은 부정자(副正子), 박사(博士), 호조좌랑(戶曹佐郞) 등을 거쳐 선조 1년(1568) 우찬성을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고 이듬해 고향에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였다.

이황의 학문세계는 이언적(李彦迪)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 주자(朱子)의 주장을 따라 우주의 현상을 이(理), 기(氣) 이원(二元)으로써 설명, 이와 기는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관계에 있다고 하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사상의 핵심으로 하는데, 즉 이가 발하여 기가 이에 따르는 것은 4단(端)이며 기가 발하여 이가 기를 타는(乘) 것은 7정(情)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한 기대승(奇大升)과의 8년에 걸친 논쟁은 사칠분이기여부론(四七分理氣與否論)의 발단이 되었다.

그의 학풍은 뒤에 그의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정구(鄭逑) 등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루었고, 이이(李珥)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畿湖學派)와 대립, 동서 당쟁은 이 두 학파의 대립과도 관련되었으며 그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그곳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황은 51세에 온혜에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 계상서당에서 10여 년 동안 계속하여 제자를 가르쳤고, 짧은 벼슬살이를 거듭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이황은 그의 가문 사람을 비롯하여 많은 학생을 가르쳤다. 이이가 이황을 만나로 온 곳이 바로 계상서당이기도 하였다.

이 도산 남쪽 기슭에서 서당을 옮겨짓기로 결심한 것은 1557년의 일이다. 이리하여 도산 남쪽에 노동력을 투입하여 땅을 고르고 자연을 바꾸어내는 일을 시작 한 것인 1558년 3월이다. 도산서당을 짓는 일은 용수사(龍壽寺)의 법연(法蓮) 스님이 맡아서 추진하였다. 용수사는 이황 집안의 온혜종택(溫惠宗宅)으로부터 4킬로미터 정도 자리 잡고 있는 절이다. 도산서당을 짓는 동안 이황은 공조판서의 직책을 역임하고 있었는데, 이황은 법연에게 서당의 설계도를 그려 보내기도 하며, 도산서당 건립에 상당한 열의를 보였다. 그러나 도산서당 건립 도중 법연 스님이 돌아가셨고, 뒤를 이어 정일(靜一) 스님이 뒤를 이어 공사를 이끌어 갔다. 그리하여 도산서당이 준공하게 되었다.

3칸으로 이루어진 도산서당은 1칸은 암서헌(巖栖軒), 1칸은 완락재(玩樂齋), 1칸은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쪽 끝 1칸은 다른 칸에 비해 아주 좁은 공간이다. 이곳에 들어서면 부엌 아궁이가 보이는데, 겨울 난방용으로 사용하였다. 중앙 칸이 완락재이다. 서쪽의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완락재로 온기가 전달된다. 완락재의 북쪽 벽면과 서쪽 벽면은 좁직하게 따로 나누어져 있다. 그 공간에는 간단히 이부자리를 놓거나 서재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완락재의 동쪽 벽은 완전히 4짝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어 4짝의 문을 열어 제치면 완락재와 암서헌이 하나의 공간이 된다. 암서헌은 완전히 대청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은 처음 지어진 모습은 아니다. 후대에 들마루의 동쪽 끝부분에 2미터 가량 처마를 더 달아 달개지붕으로 만들고, 그 아래에 마루를 깔아 덧붙였다.

암서헌의 남쪽, 도산서당의 좁직한 안마당 동남쪽 끝에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다. 이 연못은 매우 작은 사각의 규모로 이 연못에 연이 심겨져 있다. 이황은 이곳을 정우당(淨友塘)이라고 불렀다.

스토리가이드

주제 : 추구

인물 : 퇴계 이황, 용수사 승려 법련, 법련의 제자 정일

배경 : 한양의 궁성



줄거리

낙향한 지 10년이 되어서야 퇴계는 조용히 책 읽고 손님을 맞을 집 지을 터를 찾는다. 집터를 얻은 퇴계는 평소 알고 지내던 목수 일에 능한 용수사 승려 법련과 상담하여 정남향의 당에 뒤뜰을 마주해 정취어린 재를 갖춘 작은 집을 짓기로 하고, 자신이 직접 설계도까지 그린다. 공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법련이 갑자기 병으로 죽어 “어찌 하늘이 이다지도 나를 돕지 않는가”라며 탄식하기도 하지만 다행히 법련의 제자인 정일이 맡아서 일을 추진함으로써 집이 완공된다.



이야기 자료

<자료1>

<도산잡영> <<퇴계문집>> 권3



집은 세 칸인데 한 칸은 완락재(玩樂齋)이니 주자 <명당실기(名堂室記)>의 ‘즐겁게 완상하니 족히 내 평생을 다하여도 싫지 않겠다(樂而玩之, 足以終吾身而不厭)’는 말에서 취하였고, 동쪽의 한 칸은 암서헌(巖栖軒) 이니 주자 <운곡시(雲谷詩)>의 ‘스스로 오래도록 능히 하지 못하다가 바위에 깃들어 조그만 효험이라도 바란다(自身久未能, 巖栖冀微效)’는 구절에서 취하였다. 또 모두 합하여 편액하기를 <도산서당>이라고 했다. 방은 여덟 칸인데 재(齋)는 ‘시습(時習)’으로, 요(寮)는 ‘지숙(止宿)’으로, 헌(軒)은 ‘관란(觀瀾)’이라고 하고 합하여 편액하기를 <농운정사(濃雲精舍)>라고 했다. 당(堂)의 동쪽에 조그만 방당(方塘)을 파서 그 속에 연(蓮)을 심어두고 <정우당(淨友塘)>이라 이름하고, 또 그 동쪽 산기슭에서 ‘몽천(蒙泉)’이 솟아나는데 관란헌과 평평하게 만들고 단을 만들어 그 위에 매죽송국(梅竹松菊)을 심어두고 <절우사(節友社)>라고 했다. 당 앞의 드나드는 곳에는 사립으로 막아 두고 <유정문(幽貞門)>이라고 했다.



<자료2>

<<조선왕조실록>>헌개 055 02/02/12(임진) / 우참찬 송준길이 상경하자 인견, 위유하다



우참찬 송준길이 고향에서 올라오자, 왕이 인견하고 위로하기를 매우 지극히 하고서 물었다.

“판중추는 올라올 뜻이 없는가.”

준길이 아뢰었다.

“그가 틀림없이 올라올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개탄스럽게 부르시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왕이 또 민간의 기곤(飢困) 상태를 물으니, 준길이 오는 길에 바가지를 들고 구걸하는 자가 줄을 설 정도였다고 대답하고, 또 아뢰었다.

“도신(道臣)이 왕께 아뢰는 사항은 대부분 중간에서 막히고 있습니다. 귀로 듣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만 못하니, 도신이 청한 일은 조정에서 일체 들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또 중묘조(中廟朝)의 고사를 모방하여 어사를 풀어 보내서 진정(賑政)을 잘하고 있는지 살피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또 두 사찰을 헐어버린 일을 하례하고 아뢰었다.

“주자가 절을 헐어 서당을 짓는 일을 일거양득이라 하였습니다. 그 사찰 중 한 곳은 바로 북학(北學)의 옛터입니다. 절을 헐은 재목과 기와를 가지고 그대로 북학을 설립하면 좋겠습니다.”



<자료3>

<<조선왕조실록>> 영조 036 09/11/19(병신) / 도산 서원에 제사하라고 명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예기(禮記)>>를 강(講)하고, 도산서원에 제사하라고 명하였다. 한림(翰林) 김한철(金漢喆)이 말했다.

“신이 사책(史冊)을 포쇄하라는 명을 받들고 영남에 갔었는데, 선정신(先正臣) 문순공(文純公) 이황이 남긴 교화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었습니다. 아동, 주졸(走卒)들도 모두 노선생(老先生)이라고 칭하고, 척자편언(隻字片言)이라도 사람들이 모두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에게는 치제했는데, 유독 문순공에게는 미치지 않았으므로 영남 사람들이 자못 억울해 하고 있습니다.”

시독관(侍讀官) 오원(吳瑗)이 말했다.

“도산은 곧 선정(先正)이 살았던 곳인데 명묘(明廟)께서 그림으로 그려 올리게까지 하셨습니다.”

왕이 말했다.

“지난번에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講)하다가 감상이 일어나 문성공에 치제하게 되었다. 지금 듣건대, 문순공이 끼친 교화가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았다 하니, 내가 실로 흠탄(欽歎)한다. 특별히 근신(近臣)을 보내어 도산서원과 예안의 고택에 치제하게 하고 본도(本道)로 하여금 그림으로 그려 올리게 하라.”

김한철이 말했다.

“안동과 예안의 인사(人士)들이 선정의 언행을 널리 수집하여 <<퇴도언행록(退陶言行錄)>>이라 이름했으니, 마땅히 한 번 예람(睿覽)을 거쳐야 할 것입니다.”

이에 왕이 본도로 하여금 인행(印行)해 올리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