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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안동도호부_강가형

관련시설
서원_도산서원
서원_도산서원

사적 170호, 안동시 도산면 위치. 퇴계 이황을 모신 조선 최고의 사립교육기관

일반정보

조선 선비정신의 바탕골



도산서원은 낙동강 상류의 굽이치는 언덕 한편을 차지하고 주변의 낮은 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 자연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곳이다. 이 서원에는 조선의 큰 선비 퇴계 이황과 수제자 월천 조목이 배향돼 있다. 건립 시기는 이황이 죽은 지 4년 뒤인 선조 7년(1574)으로 지방유림들의 발의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75년에 선조로부터 명필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내려 받으며 사액서원으로 발전하였다. 도산서원은 강당인 전교당이 앞에 있고 사당인 상덕사가 뒤에 있는 ‘전당후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교육과 제사기능을 모두 갖춘 대표 서원건축



제사시설인 상덕사와 교육시설인 전교당이 서원의 중심에 놓이게 된 것이다. 또한 상덕사를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시켜 서원의 전체 구성이 수직구조를 가지게 하였다. 도산서당에서 도산서원 영역으로 들어가려면 진리로 나아가는 문이라는 뜻의 ‘진도문’과 만나게 된다. 진도문 양쪽에는 진리의 빛을 밝혀준다는 뜻의 도서관인 ‘동서광명실’이 자리 잡고 있다. 진도문의 정면에는 바른 것을 가르치는 강당이라는 뜻의 ‘전교당’이 서 있다. 전교당 동북쪽에는 신성한 사당을 지키는 출입문인 ‘내삼문’이 있다. 도산서원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제사건물이 바로 ‘상덕사’이다.

전문정보

조선 중기의 대표 서원, 도산서원(陶山書院)



도산서원은 조선 중기 대표적인 서원건축(書院建築)의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다. 낙동강(洛東江) 상류의 굽이치는 언덕 한편을 차지하고 주변의 낮은 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 자연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곳이다.

이 도산서원에는 조선의 큰 선비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수제자 월천(月川) 조목(趙穆)이 배향(配享)돼 있다. 이황은 조선 서원의 시발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국가의 지원을 받는 사액서원(賜額書院)인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승격시키며 서원 창설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여러 서원 창설에 관여하면서, 손수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이곳을 통해서 퇴계 학문을 계승하는 조목, 김성일(金誠一), 유성룡(劉成龍) 등 조선의 학계(學界)와 관계(官界)를 이끄는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도산서원의 건립 시기는 이황이 죽은 지 4년 뒤인 1574년(선조 7)으로 지방유림들의 발의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도산서당’의 뒤편에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75년에 선조로부터 명필 한석봉(韓石峯)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내려 받으며 사액서원으로 발전하였다. 이로써 도산서원은 선현제사(先賢祭祀)와 인재교육(人材敎育)의 역할을 담당할 뿐만 아니라, 영남사림(嶺南士林)의 정신적 중심 구실을 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書院撤廢) 당시에도 없어지지 않고 남게 된 47개 서원 중 하나였다.

도산서원은 강당인 전교당(典敎堂)이 앞에 있고 사당인 상덕사(尙德祠)가 뒤에 있는 ‘전당후묘(前堂後廟)’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상덕사가 전교당의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특징을 보여준다. 그래서 전교당은 서쪽에만 4칸의 방을 들인 예외적인 형태를 취한 채 판문으로 처리되어 있다.

원래 있던 도산서당이 작은 서당의 성립이라면 1574년 서원이 건립된 것은 전교당과 상덕사를 갖춘 대형 서원의 건립을 의미한다. 즉 새로운 제사시설과 교육시설이 마련된 것이다. 제사시설인 상덕사와 교육시설인 전교당이 서원의 중심에 놓이게 된 것이다. 상덕사를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시켜 서원의 전체 구성이 수직구조를 가지게 하였다. 또한 전체의 건물 요소마다 계단을 이용하여 다른 건축물로 이동하게 하여 건축의 위계질서를 명확하게 하고 있다.

도산서당에서 도산서원 영역으로 들어가려면 진리로 나아가는 문이라는 뜻의 ‘진도문(進道門)’과 만나게 된다. 지면보다 약간 높은 위치에 놓여 그 앞의 7-8단의 계단을 올라야 진도문을 만날 수 있다. 진도문은 1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문 가운데 큰 삼태극(三太極)이 문을 장식하고 있다. 진도문에 들어서면서 ‘진도문 - 도산서원 - 전교당’의 현판이 차례로 보이는 아름다운 장면이 연출된다. 또한 진도문의 서까래들은 빗살 모양을 이루며 아름다운 단청(丹靑)으로 치장되어 있다. 화려한 단청과 경건하게 써진 ‘진도문’이란 현판이 학문을 하기 위해 들어서는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기능을 하였을 것이다. 문기둥에 달려 있는 북은 시정잡배들의 출입을 막는 데 쓰였다고 한다.

이 진도문 양쪽에는 진리의 빛을 밝혀준다는 뜻의 도서관인 ‘동서광명실(東西光明室)’이 자리잡고 있다. 누각형(樓閣型)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한 진도문 앞에서 보면 누각 위에 올라서 있으나, 진도문 안마당에서 보면 그것들이 지면과 같은 높이에 있는데, 이는 경사면을 수직으로 깎아 누각을 올렸기 때문이다. 누각의 둥근 기둥이 두 줄로 서 있어 광명실을 날씬하게 보이고, 그 위로 날렵하게 몸체가 올라서 있다. 지붕 밑면에 빠짐없이 단청이 칠해져 있어 더욱 화려하게 보인다. 두 채의 광명실은 도산서원에 전해 내려오는 책들을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1,217종 4,917권이 보관되어 있다가 최근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옮겨 놓았다. 현재 전국 서원 가운데 장서로서는 고서와 진본이 가장 많다. 경각(經閣)이라고도 불리는 건축요소 중 하나이다.

대부분의 서원이 장판각만 존재하는 반면 도산서원은 광명실을 따로 두었다. 장판각에는 목판을 보관하고 있고, 광명실에는 서적을 보관하고 있다. 옛날에는 책의 가치가 매우 중요하였으므로 이 장판각과 광명실은 평소에 개방하지 않고 아주 특별한 때만 개방하였다.

진도문의 정면에는 바른 것을 가르치는 강당이라는 뜻의 ‘전교당(典敎堂)’이 서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서측의 정면 1칸, 측면 2칸은 온돌방이고, 동측 정면 3칸, 측면 2칸은 대청이다. 보통은 강당 건물들이 5칸인 데 비해 매우 특징적이다. 대청의 전면은 창호(窓戶) 없이 개방하였고, 측면과 후벽에만 판문(板門)을 달았다. 가구(架構)는 오량으로 초각한 대공을 종보 위에 세워 종도리 장여를 받치고 있다. 특히 온돌방 측 기단 앞에 팔각형 장주 위에 팔각 반(盤)을 올려놓은 횃불을 피워놓는 기둥모양의 정료대(庭燎臺)가 서 있다.

<도산서원(陶山書院)>이라는 현판은 전교당의 앞쪽 중앙의 처마 밑의 안벽에 걸려 있고, <전교당>이라는 현판은 북쪽 지붕 밑에 걸려 있다. 또한 전교당의 서쪽 지붕 밑에 ‘한존재(閑存齋)’란 현판이 있는데 마음이 번거롭게 욕심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존재는 원장이 거처하면서 중요한 손님을 대접하거나 학생들과 일대일 대화를 나누는 장소로 쓰였다. 전교당을 주목하는 것은 탁 틘 마루 때문이다. 대부분의 강당은 좌우에 온돌을 두고 가운데만을 마루로 하는 것이 보통인데, 전교당의 경우는 한쪽에만 온돌을 두고 나머지는 마루를 두어 마루를 더욱 넓게 한 것이 특징이다.

전교당 앞 마당 좌우에는 동재(東齋)인 ‘박약재(博約齋)’와 서재(西齋)인 ‘홍의재(弘毅齋)’가 자리하고 있다. 모두 <<논어(論語)>>에서 따온 이름으로 ‘널리 공부하여 예의로 묶어 내며’ ‘너른 마음과 굳센 의지를 길러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몸과 마음을 갈고 닦는 곳이라는 당부를 담고 있는 건물로 크기와 모양은 같다. 이 건물들은 각각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이루어져 있고, 2칸의 큰 방과 1칸의 작은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박약재는 선배들이 기숙하였던 공간이고, 홍의재는 후배들이 기숙한 곳이다.

전교당 동북쪽에는 신성한 사당(祠堂)을 지키는 출입문인 ‘내삼문(內三門)’이 있다. 삼문은 이름 그대로 3칸으로 이루어졌고, 대문 안과 밖에는 신성공간을 상징하는 삼태극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 가운데 문의 태극무늬가 다른 문에 그려져 있는 방향과 반대로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다른 두 문과 달리 사람이 드나드는 문이 아니라 영혼이 드나드는 문이기 때문이다.

도산서원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제사건물이 바로 ‘상덕사(尙德祠)’이다. 상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구성된 건물이다. 삼문을 두고 주위에 담장을 둘러 추모의 공간임을 뚜렷이 부각시키고 있다. 내부구성은 정면 3칸에 측면 1칸 반으로 되어 있어 바로 바닥으로 떨어져 막힌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상덕사 내부 중앙에는 퇴계선생의 위패와 좌측면에 제자 월천 조목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어, 두 분의 위패를 모시고 제를 올린다. 매년 2월과 8월의 중정일(中丁日), 즉 간지(干支)로 정(丁)이 들어가는 두 번째 날에 향사(享祀)를 지낸다. 상덕사의 주변에는 전사청(典祀廳)이 붙어 있어, 향사를 지낼 때 제물을 마련하는 기능을 한다.

스토리가이드

주제 : 발견

인물 : 선조 임금, 한석봉

배경 : 경복궁 인정전



줄거리

선조가 명필 한석봉에게 도산서원 현판을 쓰게 한다. 선조는 미리 도산서원 현판임을 알려주고 쓰게 하면 놀라 붓이 떨려 글씨가 잘 안 써질 것을 걱정해 도산서원 네 글자를 거꾸로 부른다. 한석봉은 영문도 모른 채 왕이 부르는 대로 받아쓴다. 처음 원자를 쓰고, 다음에 서자, 그 다음에 산자를 쓰게 된다. 마지막으로 도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도산서원 현판을 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깜짝 놀라 붓이 떨리는 바람에 마지막 도자가 비뚤게 쓰여지게 된다.



이야기 자료

<자료1>

<<조선왕조실록>>헌종 006 05/11/10(임인) / 우의정 조인영이 서원의 치제와 경행있는 선비의 별천을 아뢰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서 대신과 비국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조인영(趙寅永)이 아뢰었다.

“신이 지난번 척사윤음(斥邪綸音)을 찬진(撰進)하였을 때 정학(正學)을 밝힘으로써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근본으로 삼은 것은 마치 중국이 융성하면 오랑캐가 감히 업신여기지 못하고, 원기(元氣)가 충실하면 질병이 침범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선현을 포장(表章)하여 인사(人士)를 권면하는 방도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이러한 때의 선무(先務)로 삼아야 합니다. 각 도의 서원 가운데 관서(關西)의 인현(仁賢), 해서(海西)의 소현(紹賢), 송경(松京)의 숭양(崧陽), 기보(畿輔)의 도봉(道峰), 호남의 죽림(竹林), 영남의 옥산, 도산, 호서(湖西)의 화양(華陽), 금담(黔潭)의 여러 곳은 모두 도통(道統)과 관계되는 분을 제향하는 곳인데, 우리 성상께서 등극하신 후에 사모하시는 뜻을 전달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제 만약 일례로 치제(致祭)하는 은전이 있게 되면, 유학을 존숭하는 정치를 더하고 도덕을 숭상하는 뜻을 보이는 데 충분할 것입니다. 신이 또 언단(言端)으로 인하여 잇따라 진계(陳啓)할 것이 있습니다. 이에 앞서 경행(經行)이 있는 사람을 별도로 천거하여 진실로 이미 많은 인재를 얻었으나, 산림 사이에서 혹 수선(守善)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누락되었다면, 아마도 산야의 어진 사람을 빠짐없이 등용하는 도리가 아닌 듯싶습니다. 또 명년 봄은 식년(式年)으로서 응당 천거해야 할 때에 해당하니, 각도에 신칙해서 더욱 수방(搜訪)하여 반드시 독실하게 공부하고 힘써 행하는 선비를 사실대로 천거하게 하되, 마땅한 사람이 있으면 많고 적은 것에 반드시 구애받지 말게 하고, 마땅한 사람이 없으면 또 구차하게 수만 채우지 않도록 하소서. 요컨대 마땅한 사람을 얻는 데 힘써서 차례대로 시험하여 임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래서 감히 진언드립니다.

대왕대비가 하교했다.

“정학을 밝힌 후에야 사교(邪敎)를 물리칠 수 있으니, 서원에 치제하는 일을 조속히 거행하도록 하라. 경행이 있는 선비를 별도로 천거하도록 아뢴 것 또한 매우 좋으니,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자료2>

<<조선왕조실록>> 숙종 005 02/09/05(갑신) / 예천 생원 변지두 등이 이황과 조목을 합향한 서원에 사액할 것을 청하다



예천 생원 변지두(邊之斗) 등이 상소하여 본군(本郡)에 있는 이황과 조목을 합향한 서원에 사액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조목은 이황의 문인인데,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벼슬이 공조 참판에 이르렀다.



<자료3>

<<조선왕조실록>> 영조 086 31/12/14(계축) / 이황의 후손 이세택을 포장하고 <<성학십도>>를 간행케 하다



교리(校理) 이세택(李世澤)이 상소하고 선정(先正) 문순공 이황이 편찬한 <<성현도학연원>>을 올리니, 임금이 상을 내려 답하고, 친히 서문을 지었으며, <<성학십도>>에도 아울러 서문을 친히 짓고, 영남 도신(嶺南道臣)에게 간행하여 올리라고 명하였다. 유신(儒臣)을 보내어 도산서원에 제사를 올리고, 이세택에게 초모(貂帽)를 내렸으니, 이세택은 이황의 후손이요, 도산서원은 이황의 제사를 받드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