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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정보

미약한 농업생산성으로 발전이 지체된 시장과 상점



상점은 일정한 장소에서 언제나 상품을 판매하는 가게로 소비자가 늘 찾아오는 상설시장 안에 있었다. 우리나라는 폐쇄적인 자급자족적 농업경제 사회였고 분업에 의한 생산성 향상, 인구 증가와 유동성, 교통통신과 화폐경제 등의 발달이 미약했을 뿐 아니라 상업을 천시하는 전통 때문에 시장과 상점의 발달은 정체되었다. 조선사회에서는 생산물을 상품으로 전화할 수 있는 잉여생산물의 주체는 국가뿐이었기 때문에 국가에 의해 관리되었던 ‘시전’ 위주의 시장경제였다. 지방시장인 향시는 대개 5일장이었므로 상시적인 형태인 상점은 발달되지 않았다.



시전의 공랑을 모방하여 창고와 행랑이 결합한 상점 건물



지방의 시장인 향시는 매일 열리는 상설시와 아침저녁으로 열리는 조석시 그리고 일정한 기간을 두고 열리는 정기시장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가장 보편적인 것은 정기적으로 열리는 5일장이었다. 대부분의 향시는 상품의 종류에 제한이 없는 ‘보통시장’이었지만, 지역에 따라 가축만 거래하는 가축시장, 어물시장, 곡물시장, 땔감을 거래하는 땔나무시장, 대구, 전주, 원주의 약령시 등의 ‘특수시장’이 발달하기도 했다. 따라서 판매되는 상품의 종류에 따라 상점의 구조에 일정한 차이를 보이기는 하나, 상설시장이 가능한 읍성규모의 지방 상점은 민간가옥의 창고와 행랑을 변형하여 시전의 공랑 형식을 따랐다.

전문정보

상품의 보관과 판매를 배려한 창고와 행랑을 결합한 상점 건축



상점은 일정한 장소에서 상시적으로 상품을 판매하는 가게이므로 상품구매자가 늘 찾아오는 상설시장 안에 있거나 구매자가 상시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폐쇄적 자급자족의 농업경제사회였고 분업에 의한 생산성의 향상, 인구증가와 유동성, 교통통신이나 화폐경제 등의 발달이 미약했을 뿐 아니라 상업 천시의 전통 때문에 시장과 상점의 발달은 정체되었다.

문헌에 나타나는 최초의 시장은 490년(소지왕 12)에 개설된 경시(京市)다. 전반적으로 볼 때, 고대사회에서는 마을 사이에서 열렸을 경계시(境界市), 정치와 사회생활의 중심지에서 섰을 성읍시(城邑市), 또는 가로시(街路市) 외에 외지와의 교통요충지에 비정기적이긴 해도 국제시장(國際市場)도 있었다. 화폐와 시장의 발달은 마을 단위의 폐쇄적 재생산구조의 장벽을 허물어뜨리고, 이질적 요소를 동화시키며 동질적 요소로 통합시켜 점차 시간과 공간을 상대적으로 축소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역사의 발전에 따라 당시의 생산력에 부응하는 교역이 이루어져 점차 향시(鄕市)로부터 경시의 개설요구로 증대되었다. 509년(지증왕 10)에는 동시(東市)를 설치하고 시전(市廛)이라는 시장감독관청을, 통일신라시대는 서시(西市)와 남시(南市)를 열어 삼시전(三市廛)을 두었다. 삼시전은 경시서(京市暑)와 평시서(平市暑)라는 시장감독관청과 함께 주로 시장개폐의 시각, 도량형의 사용, 분쟁의 조정, 어용품(御用品)의 조달 등의 역할을 했다. 조선에 이르기까지 줄곧 낮은 생산성으로 생산물의 상품으로의 전화(轉化)가 어려웠고 더구나 상품으로 전화시킬 수 있는 잉여생산물의 대표적 소유자가 국가나 사원 또는 일부의 특권귀족들이었기 때문에 상업의 자생적 발전이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른바 민리(民利)를 위하여 상업이 장려되고 이를 위하여 주점(酒店)과 원(院) 그리고 객관(客館) 등이 설치되기도 하였으나, 상업은 말업(末業)에 지나지 않았고 상인은 천시되었다. 당시의 상인은 대체로 좌상(坐商), 행상(行商), 선상(船商)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 중 부상대고(富商大賈)들은 대부분 국가나 궁원(宮院)의 어용상인(御用商人)이었다. 철저한 관영무역원칙 아래에서 상인들의 자유스러운 상행위를 통한 시장의 발달은 기대할 수 없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시장은 크게 방시(坊市)와 향시(鄕市)로 나눌 수 있다. 방시는 신라의 경시와 같은 것으로 상설시장이었으며, 향시는 대체로 정기시장이다. ‘리(里)’가 일반인들의 거주지역임에 대해 ‘방(坊)’은 상인들의 거리이므로, 방시는 곧 시전(市廛)을 뜻한다. 방시는 관설시장임과 동시에 상설시장이라는 점에서 지방의 향시와 다르다. 방시의 상인들은 국가로부터 시전건물을 대여받고 일정한 사용료를 지불하며 국가가 요구하는 물자를 조달함으로써 특권상인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시전상인의 특권이 제도화되면서 시장의 자유롭고 활기찬 발달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방시가 관에 의해 설치된 시장인 데 비해 향시는 잉여생산물의 처분과 필요한 물품의 구입을 위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열리게 된 지방시장이다. 따라서 농민, 수공업자 등과 같은 직접생산자들이 판매자임과 동시에 구매자로서 서로 정기적으로 만나는 상호교환의 장소가 향시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를 통하여 상품으로서 시장에서 거래되었던 물품의 종류는 모두 100종을 넘지 않았다. 향시에서의 거래 물종은 더 적었을 것으로, 미포(米布)와 같은 물품화폐로도 큰 마찰 없이 거래는 이루어졌다. 향시는 기존의 재생산과정을 단순 반복시키는 최소한의 맥박 구실만 수행하였을 뿐, 화폐제도의 개혁이나 생산성의 제고를 초래하는 사회, 경제적 변화를 담당하지 못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묘사되어 있는 향시의 모습은 한낮이 되면 남녀노소와 관리 및 온갖 직업의 사람들이 상설의 점포가 없는 일정한 장소에 각자의 소유물을 가지고 모여들어 교역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때 주조된 화폐는 쓰이지 않고 다만 저포(紵布)나 은병(銀甁)을 가치의 기준으로 삼아 교환하고, 큰 거래의 우수리의 계산이나 사소한 일용품의 교환에는 쌀이 쓰였다고 한다.

향시의 개시 시각이 한낮인 것은 하루에 왕복이 가능한 마을 주민들에게 장 볼 기회를 주기 위해서이다. 비록 상설점포도 없는 지방시장이지만 향시는 상품과 정보교환의 중심지로서 주위의 촌락들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일정한 지역에서 가장 적은 수의 시장으로 이러한 역할을 수행토록 하기 위해서는 개시일이 정해져 있는 경우 한낮에 장을 서게 하는 방법이 최선이다. 당시의 생산력 수준을 감안해 볼 때 향시는 부정기시장 또는 정기시장이었다. 이는 촌락에 매일 정오에 장이 설 만큼 구매력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방의 시장, 즉 향시는 매일 열리는 상설시(常設市)와 아침저녁으로 열리는 조석시(朝夕市) 그리고 일정한 기간을 두고 열리는 정기시(定期市)로 나눌 수 있지만, 가장 보편적인 것은 정기적으로 열리는 5일장이었으므로 상시적인 형태인 상점은 크게 발달되지 않았다. 그러나 상업경제가 활성화되는 조선 후기에 이르면 지방시장에도 점차 상설 점포가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당시 읍성규모의 지방도시에 있는 상점은 판매되는 상품의 종류에 따라 상점의 규모나 구조에 차이가 있지만, 민간가옥의 창고와 행랑을 변형하여 시전의 공랑(公廊) 형식을 따랐다.

비교대상

하회 유성하가옥 대문채



하회 유성하가옥은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하회마을 내에 위치한다. 유성하가옥은 초가 대문채를 개조하여 상점으로 이용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초가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채이기 때문에 오른쪽 1칸은 쌍여닫이 대문으로 되어 있고, 중앙칸과 왼쪽칸이 상점으로 중앙칸에 미닫이문으로 달아 상점의 공간을 최대한 확보하고 있다. 좌측면에는 살창이, 우측면은 벽체로 구성되어 있다. 뒷면 역시 막혀 있으며, 상점의 공간을 넓히기 위해 반 칸을 덧대어 달았다.



국립민속박물관 상점



국립민속박물관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1번지에 위치한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칸은 죽물점, 신발과 갓 판매점, 포목점으로 꾸며 놓았다. 이 상점의 가장 큰 특징은 판매 공간을 위해 문을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왼쪽과 오른쪽 칸은 문을 가로로 여닫도록 되어 있는데, 문을 열어 위 아래로 고정하게 하여 상점을 개장하면 아래 문에 물건을 전시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또한 그 문을 닫으면 건물이 폐쇄된다. 내부는 판매 물건에 따라 온돌방 혹은 마루, 바닥으로 되어 있고, 측면에는 창을 내거나 띠살문을 달았다.



대망드라마세트 상점



대망드라마세트는 충북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 청풍문화재단지 내에 조성되어 있다. 드라마를 찍기 위해 만든 세트이기 때문에 세트의 특징이 그대로 나타난 건물이다. 이 건물은 2층 구조의 집과 유기점이 결합된 건물이다. 유기전은 건물의 오른쪽 2칸에 조성되어 있어 오른쪽만 카메라로 비친다면, 유기점이 되게 만들고 있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1칸이며 우진각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벽체는 우측과 정면을 완전히 개방시켜 놓아 전시된 물건이 잘 보이도록 하였다. 또한 바닥은 마루로 되어 있다. 내부 후면에 띠살문을 달아 마치 뒷면에 온돌방이 있는 것처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