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한국국학진흥원

기타

추모시설
안제묘
안제묘 가상복원_0 돋보기
안제묘

안제묘

일반정보

안동 분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묘



경북 안동시 와룡면 중가구동 세곡(가느실)에 위치한 안제의 묘소이다. 안제는 세 번 결혼하였으나 아들딸이 한 명도 없어 부인 권씨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 묘소를 매우 크고 장엄하게 꾸몄다. 묘역은 아버지 안수의 봉분과 나란히 이어서 만들었으며, 묘비, 상석, 향로석, 망주, 문인석이 있다. 사니산 아래에 있는 안동 권씨 권춘란의 아버지 석충공의 묘소를 만들었던 석공이 이 묘소도 완공하였다. 특히 안동지방에서도 큰 규모의 석조물을 가지고 있어, 조선 중기 조각공의 기술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라 할 수 있다.



돌 기념물이 잘 갖춰진 안동의 분묘



안동의 무덤은 어느 묘든 묘소 뒤쪽의 사방을 살펴보면 좌우형국의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어는 곳이든 잘 둘러싸여 있고 묘소 앞으로는 상석과 비석, 망주와 석상이 갖춰져 있다. 묘소 앞에서 봉분을 우러러 보면 시신을 매장한 곳이라기보다 관념적으로 고인을 추모하는 상징적 기념물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택리지>>에 따르면, 안동은 태백산과 소백산의 남쪽에 위치한 신이 점지한 복된 땅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학자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현재 분묘는 선산의 3단 기단 가운데 가장 아래에 배치되어 있다. 문화재 지정은 안되었으나 매우 뛰어난 석물과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전문정보

안동 분묘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안제묘소



경북 안동시 와룡면 중가구동 세곡(일명 가느실)에 위치한 안제의 묘소이다. 묘주인인 안제는 중종 33년(1538)에 태어나 섡 35년(1602)에 65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본관은 순흥이고 자는 여지(汝止)이고, 호는 동고(東皐)이다. 헌납 벼슬을 지낸 안수(安琇)의 아들이다. 외할아버지는 봉성(鳳城) 금원복(琴元福)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의 문인이었다. 구봉령 문하에서 회곡(晦谷) 권춘란(權春蘭)과 함께 공부하며 호형호제하는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이 서로 농담으로 먼저 죽는 이의 묘비문을 지어 줄 것을 약속하였는데 안제가 먼저 죽자 권춘란이 비문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1561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80년 문과에 급제했다. 성균관 학유, 사헌부 감찰, 사섬시첨정, 형조좌랑, 충청도사, 용궁현감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일으킨 공으로 원종훈(原從勳)에 책록되었다. 죽은 뒤에 예조참의로 증직되고 노봉사(蘆峰祠)에서 제사지냈다. (권춘란이 쓴 <묘갈명>에 나온다)

안제는 세 번 결혼하였으나 아들딸이 한 명도 없어 부인 권씨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 묘소를 매우 크고 장엄하게 꾸몄다. 묘역은 아버지 안수의 봉분과 나란히 이어서 만들었으며, 묘비, 상석, 향로석, 망주, 문인석이 있다. 사니산 아래에 있는 안동 권씨 권춘란의 아버지 석충공(錫忠公)의 묘소를 만들었던 석공이 이 묘소도 완공하였다. 특히 안동지방에서도 큰 규모의 석조물을 가지고 있어, 조선 중기 조각공의 기술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라 할 수 있다.

안동의 무덤은 어느 묘든 묘소 뒤쪽의 사방을 살펴보면 좌우형국의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어는 곳이든 잘 둘러싸여 있고 묘소 앞으로는 상석과 비석, 망주와 석상이 갖춰져 있다. 묘소 앞에서 봉분을 우러러 보면 시신을 매장한 곳이라기보다 관념적으로 고인을 추모하는 상징적 기념물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택리지(擇里志)>>에 따르면, 안동은 태백산과 소백산의 남쪽에 위치한 신이 점지한 복된 땅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학자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현재 분묘는 선산의 3단 기단 가운데 가장 아래에 배치되어 있다. 문화재 지정은 안되었으나 매우 뛰어난 석물과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스토리가이드

주제 : 수수께끼

인물 : 정씨 집안 사람들, 풍수장이

배경 : 마을 근처의 산



줄거리

정씨 가문에서 집안 어른이 돌아가시자 풍수를 구해 묘터를 물색한다. 풍수가 명당을 알려주며 ‘두어 자 정도 파면 큰 바위가 있을 것인데 구덩이가 얕더라도 바위를 파내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큰 바위가 나오자 의견이 분분하다가 파내자는 의견이 우세해 바위를 들어내게 된다. 그 때 바위 밑에서 황금 광채가 나더니 하얀 학 한 마리가 하늘로 날아가므로, 사람들이 놀라서 바위를 도로 놓자 따라 나오던 숫학의 다리가 부러진다. 그 후 그 집안엔 상처한 홀아비가 많고 다리 불구자가 많이 나온다.



이야기 자료

<자료1>

<이혜동진> <<삼국유사>> 권4



승려 혜숙은 호세화랑을 따르다가 그가 물러나자 적선촌에서 같이 살았다. 당시 국선 구참공이 사냥을 하는데 혜숙도 따라가 사냥터에서 앞을 다투어 달렸으며, 고기도 함께 먹었다. 혜속이 더 맛있는 고기를 드리겠다며 자기의 넙적다리를 베어 소반에 놓아 바치자 구참공이 놀라는 것을 보고, ‘어진 사람인줄 알고 따랐는데 지금 보니 살육에 몰두해 남을 해쳐 자기를 살찌울 뿐이다’며 옷을 털고 가버렸다. 구참공이 무안하여 그가 먹은 데를 자세히 보니 소반에 고기가 그대로 있으므로 이상히 여겨 조정에 들어가 아뢰었다.

진평왕이 사람을 보내어 부르러 갔더니 혜숙이 여자의 침상에 누워 자는 체하고 있었다. 사자가 천하게 여기고 되돌아오는데, 오는 길에서 법사를 만났다. 어디서 오는 길인지를 물으니, ‘성안 시주집의 칠일재에 갔다가 법석을 파하고 돌아온다’고 하므로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았더니 사실이었다.

얼마 후 혜숙이 갑자기 죽으니 마을 사람들이 이현 동쪽에 장사지냈다. 이때 고개 서쪽에서 오던 사람이 길에서 혜숙을 만났는데, 어디로 가는지를 물었더니 “이곳은 오랫동안 살았으므로 다른 지방으로 가보려 한다.”고 했다. 서로 인사를 하며 작별한 후, 혜속은 반리 남짓 와서는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그 사람은 장사 치르던 사람들이 아직 흩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 그 사유를 말하고 무덤을 열어보니 짚신 한 짝이 있을 뿐이었다.



<자료2>

<안동유씨 묘지> <<한국민간전설집>>



조선시대 안동에서 김씨 문중의 여자가 유씨 가문에 시집을 갔는데, 친정아버지와 시아버지의 초상을 같은 해에 당하게 되었으므로 양가에서는 좋은 묏자리를 찾게 되었다. 김씨 집은 부자였으므로 팔도의 풍수장이를 다 불러들여 좋은 자리를 택했지만 유씨 집은 재력이 없어 구하지 못했다. 유씨 집 며느리가 친정아버지 초상 때문에 친정에 와 있다가 풍수장이가 친정오빠에게 “좋은 묏자리를 찾아 혈까지 파놓았는데 내일 정오까지 물이 나오지만 않으면 삼대 정승이 날 것이다”고 하는 말을 듣고는 밤중에 몰래 가서 물을 부어 놓고 왔다. 다음날 가보니 물이 나와 있으므로 김씨 집에서는 묏자리를 다른 곳으로 정했다. 그녀는 친정어머니께 간청해 그 자리를 얻어 시아버지를 묻었는데, 그 후로 김씨 집은 차츰 쇠하고 유씨 집은 번영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료3>

<<조선왕조실록>> 광해 040 03/04/30(기해) / 예조에서 개성에 있는 서경덕의 묘가 발굴당한 일과 그것을 복구하는 일로 아뢰다



예조에서 아뢰었다.

“개성의 화담(花潭)은 바로 서경덕(徐敬德)이 생전에 살던 곳으로 지금 66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조정에서 상공(上公)의 직질(職秩)을 추증하기까지 하였고, 원근의 사자(士子)들이 귀의(歸依)할 곳으로 여기고 있는데, 이번에 분묘가 발굴을 당하는 변고가 발생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실로 근고(近古)에 볼 수 없었던 일이고, 인심과 세도가 놀랍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본관과 본도에서는 아직껏 치계하지 않고서 미편하다고 핑계를 대고, 개성부에서는 비록 소속 지역은 아니더라도 선현의 무덤에 생긴 이 변고를 위하여 유수가 친히 살피기까지 하고서 해조에 이문(移文)하였으니 보통일로 넘길 것이 아닙니다.

서울에서 향을 내리고 제문을 제술하여 본도의 도사(都事)로 하여금 치제토록 하고, 또 본도로 하여금 조묘군(造墓軍) 약간 명을 제급하여 그들로 하여금 무덤을 봉식(封植)하고 그 발굴한 사람을 염문하여 적발해서 엄히 다스리고 정죄한 뒤 계문토록 함으로써, 조정에서 문치(文治)를 숭상하고 선현을 예우하는 뜻을 드러내게 하는 일을, 개성부와 본도에 똑같이 행이(行移)하게 하소서.”

이에 왕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