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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석조건축물

군사시설
조령산성 주흘관
조령산성 주흘관

조령산성 주흘관

일반정보

선비의 푸른 꿈을 안고 넘나들던 조령산성



우리나라는 산이 많은 지형이므로 일찍이 산성이 발달하였다. 산성은 무엇보다 험한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적의 공격을 약화시키는 군사적인 이점이 있어 많이 세워졌다. 문경의 조령산성은 선조 2년(1592)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경주에서 북상해오는 카토오 키요마시의 군사와 합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1관문을 주흘관, 제2관문을 조동문 혹은 조곡관, 제3관문을 조령관이라 한다. 특히 조령산성은 경상도에서 충청도를 이어주는 중요한 관문산성이다.



교통과 군사의 요충지에 건설된 관문산성



나는 새도 넘기 힘들다는 문경새재는 고려 초기부터 조령이라 불리면서 중요한 교통로로 자리 잡았다. 높은 산과 깎아지른 고개들이 병풍처럼 이어져 충북과 경북의 경계를 이룬 천혜의 요새지이다. 이곳에 세워진 문경관문은 영남지방과 서울간의 관문이자 군사적 요새지이다. 제1관인 주흘관의 문루는 정문 3칸, 측면 2칸, 협문 2개가 있고 팔작지붕이 덮혀 있다. 기단부는 무지개문과 견고한 문이 설치되어 있다. 성벽은 동쪽과 서쪽이 크게 휘어져 치성의 역할을 대신하도록 설계되었고 물길을 이어서 해자를 형성하였다. 관문 옆의 물구멍인 수구문은 관원의 눈길을 피해 숨어 드나들던 문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전문정보

천혜의 요새지에 건설된 관문, 조령산성(鳥嶺山城) 주흘관(主屹關)



우리나라는 산이 많은 지형이므로 일찍이 산성(山城)이 발달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전국에 759개소의 성곽(城郭)이 있었고, 이 가운데 산성이 182개로 가장 많았다. 산성은 무엇보다 험한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적의 공격을 약화시키는 군사적인 이점이 있어 험한 요새지나 교통의 요충지에 많이 세워졌다.

조령산성(鳥嶺山城)이 자리 잡고 있는 문경새재는 옛날 영동의 추풍령, 단양의 죽령과 더불어 백두대간(白頭大幹)을 넘나드는 3개의 고개 중 으뜸으로 칠 만큼 중요한 교통로이다. 과거를 보러 한양길에 오르던 영남 선비들의 과거길이었고 조선 초기에는 관료들과 양반들만이 넘나들 수 있던 고급 길이었기에 지체 낮은 서민들이 꼭 한번 걸어 보고 싶은 동경의 길이기도 하였다.

군사적으로는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경주에서 북상해오는 카토오 키요마시의 군사와 합류해서 공격하려 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 때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킬 것이라 생각했지만, 신립장군은 조령에서 왜군을 막지 않고 충주 탄금대에서 왜병을 맞서 싸우다가 패하고 말았다.

옛날 하늘재 길을 대신하여 조선 태종 때부터 본격적인 관로로 이용되기 시작하여 후에 보부상을 비롯한 서민들이 다녔고 조선 말기에는 도적들이 기승을 부렸다고 한다. 조선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폭 1미터 안팎의 작은 길에 불과하였던 것을 잦은 외침의 영향으로 이 곳을 군사적 교통 요충지로 인식하여 총 길이 10킬로미터에 세 개의 관문을 두어 모두 이를 이용하는 관방(關防)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전쟁 대비의 실패 원인을 반성하면서 조령에 대대적으로 관문을 설치할 것을 꾸준히 논의하다가 1708년에 이르러서야 3개의 관문을 완성했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1관문을 주흘관, 제2관문을 조곡관(鳥谷關), 제3관문을 조령관(鳥嶺關)이라 한다. 조곡관은 1592년 임진왜란 후 신충원이 이곳에 성을 쌓은 후부터 중요한 교통로가 되었다. 1708년에 조령산성을 쌓을 때 매바위 북쪽에 있던 옛 성을 고쳐 쌓고, 중성을 삼아 관문을 조곡관이라 했다. 현재의 시설은 페허가 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문경새재 제1관문인 주흘관은 폐허가 된 것을 1904년과 1975년에 중수하였고 누각은 정문(正門) 3칸, 측면(側面) 2칸, 협문(夾門) 두 개가 있는 팔작(八作) 지붕이며 홍예문(虹霓門)의 높이는 3.6미터이며 부속 성벽의 폭과 높이는 각각 2-3미터이며, 길이는 동쪽과 서쪽이 모두 400여 미터이다. 바깥 성벽은 깎아지른 듯 올려 세웠고 안쪽으로는 계단식 지형을 형성하여 방어에 유리하게 만들었다.

한편 구한말 천주교 신자들에게 새재는 박해를 피해 지나가던 도피로이기도 했다. 그래서 제 1관문인 주흘관 옆 수구문(水口門)은 관원의 눈길을 피해 숨어 드나들던 문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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