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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 봉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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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 봉수대

주전 봉수대

일반정보

남쪽 바다의 위급함을 전하던 봉수대



울산 주전에 세워진 봉수대이다.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을 말하며,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울산광역시 동구 봉대산에 있는 이 봉수대는 조선 세조 때 쌓은 것으로 둘레 5미터, 높이 6미터의 원통형으로 되어 있다. 간봉의 봉수대는 연기를 멀리 보내기 위해 5봉이 아니라 단봉으로 크게 지었으며, 세종 때 봉수대의 일반형인 사각형과는 형식상 차이가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나선형 계단을 타고 올라간 단봉 봉수대



이 봉수대는 현존하는 많은 봉수대 가운데 그 원형이 잘 보존된 것으로, 봉수대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높이 약 6미터, 직경 약 5미터의 원통형 석축이다. 직봉의 봉수대와는 달리 간봉의 봉수대는 연기를 멀리 보내기 위해 5봉이 아니라 단봉으로 크게 지었으며, 세종 때 봉수대의 일반형인 사각형과는 형식상 차이가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울산지방 간봉망 5개 봉수대에 배속하였던 봉군 구성은 다음과 같다. 도별장 5명, 번별장 25명, 오장 25명, 군과 보 435명이다.

전문정보

울산 주전에 세워진 봉수대(烽燧臺)



울산 주전에 세워진 봉수대이다.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을 말하며,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울산광역시 동구 봉대산에 있는 이 봉수대는 조선 세조 때 쌓은 것으로 둘레 5미터, 높이 6미터의 원통형으로 되어 있다. 세종 때 일반적으로 만들었던 사각형의 봉수대와는 형식상 차이가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남으로 화정의 천내 봉수대에서 봉수를 받아 북의 우가산 유포봉수대에 전하였는데, 뒤에 유포 봉수대가 폐지되면서 경주의 하서지에 전달하였다.

울산지방의 간봉을 살펴 보면 부산의 황령산을 기점으로 동래의 간비오산(干飛烏山), 기장의 남산, 장안읍의 임랑포(林浪浦)와 아리포, 서생면의 이길곶을 거쳐 하산(下山), 가리(加里), 천내(川內), 남목천(南木川), 유포(柳浦), 등 울산군과 울산시의 봉수를 지나 경북의 하서지(下西知), 독산(禿山, 慶州郡), 복길(卜吉, 장기), 뇌성산(磊城山, 장기)을 연락하여 영일 흥해에서 안동의 주봉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들고 있는 것들은 <<동국여지승람>>에 등재된 울산의 봉수대 가운데 유포봉수대는 영조 25년 이전에 이미 폐지되었다. 가리봉수대는 북쪽으로 기박산성 북의 대점 봉수대에도 응하여 경주에 연계하였다.

주전봉수대는 현존하는 많은 봉수대 가운데 그 원형이 잘 보존된 것으로, 봉수대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주전에 있는 남목천봉수대는 조선 세조 때쯤 세워진 것으로 1976년에 울산의 향토사 연구계에서 발견하여 복원한 것인데 높이 약 6미터, 직격 약 5미터의 원통형 석축을 하고 있다. 직봉의 봉수대와는 달리 간봉의 봉수대는 연기를 멀리 보내기 위해 5봉이 아니라 단봉으로 크게 지었으며, 세종 때 봉수대의 일반형인 사각형과는 형식상 차이가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울산지방 간봉망 5개 봉수대에 배속하였던 봉군 구성은 다음과 같다.



도별장(都別將) 5명, 번별장(番別將) 25명, 오장(伍長) 25명, 군(軍) 보(保) 435명



현존하는 문화재자료 16호(2000.11.09.)인 주전봉수대관련고문서(朱田烽燧臺關聯古文書)는 주전봉수대(울산광역시 기념물 제3호)의 운영 실상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철종 9년(1858)-고종 33년(1896) 사이의 것으로 모두 11점이며 한지에 필사한 것이다.

고문서에는 울산부사가 박춘복, 박명대 부자에게 내린 주전봉수대 별장 임명장과 별장과 인근 동수에게 근무를 철저히 하고 군포를 잘 징수하라는 전령문 그리고 미포 정자 등 봉수대 인근마을로부터 군량 형식으로 거둔 금전의 내역을 기록한 문서와 울산부에서 주전봉수대에 내려준 조총 등 무기와 솥 등 장비의 목록, 또 별장이 이를 점검하여 이상유무를 보고한 문서들이 있다.

이 고문서를 통해 주전봉수대는 수령의 관할 아래에 있었고 봉수군은 봉수를 담당하면서 유사시에는 적군을 맞아 싸우는 군사 역할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봉수군역은 봉수대 인근 주민들이 담당하였고 군량 등 운영경비도 이들이 공동으로 부담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고문서는 조선 후기 봉수대의 운영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스토리가이드

주제 : 탈출

인물 : 성종, 유권과 신하들

배경 : 한양의 궁성



줄거리

북쪽 변경 지역에 오랑캐의 출몰이 잦다가 성종 6년에는 무장한 오랑캐 기병 30여 기가 창주를 침략한 뒤 고림의 봉수대를 공격한다. 이때 봉수군 여섯이 맞서 싸우다 하나는 죽고 나머지는 달아나 죽음을 면한다. 보고 받은 왕이 병사가 겨우 6명이고 적이 30명의 절대 세 불리의 상황에서 어떻게 한 사람이 죽는 것으로 끝났는지 궁금해 한다. 이에 유권은 고림 봉수대의 지형이 험난함을 들어 그럴 수 있음을 설명한 후, 연안 및 내륙의 백성을 모아 보에 들어가 방비하도록 할 것을 건의한다.



이야기 자료

<참고1>

<<조선왕조실록>> 광해 127 10/04/26(갑신) / 평안 병사 김경서에게 서쪽 변방의 일로 전교하다



왕이 전교하였다.

“내가 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에 직접 만나서 일러주지 못하게 되었다. 경은 내려가서 ‘탐욕스럽고 분수에 넘치며 용렬한 변방의 장수들을 분명히 조사하고 자세히 살펴서 아뢰고, 성 둘레의 못과 군사용 장비를 수선하고 군병을 조련하며 군졸을 보살펴 주도록 하고, 또한 오랑캐를 잘 대우하고 기율을 엄히 밝히고 봉수(烽燧)를 점검하는 등의 일에 더욱 마음을 쏟아 착실히 거행함으로써 서쪽 변방의 근심을 덜 수 있게 하라고 평안병사 김경서(金景瑞)에게 각별히 말해 보내도록 하라.󰡓



<참고2>

<<조선왕조실록>>성종 055 06/05/27(을해) / 봉수 문제를 일체 사목에 따라 시행하게 전교하다



왕이 병조(兵曹)에 전교했다.

“태평한 세월이 오래되면 봉수(烽燧)가 해이해지기는 하지만, 근년에 여러 번 변방의 변고가 있었는데도 모두 변고를 알리지 않았으니, 무슨 까닭인가? 거듭 밝혀서 거행하되, 일체 다음의 항목에 의거해 시행하도록 하라.

하나, 이후로는 변경에서 서울에 이르는 사이에 있는 봉수대 중 살피기(候望)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중간에 끊어져 통하지 않는 것이 있거든 철저하게 국문하여 중죄로 다스릴 것.

하나, 해당 부서에서는 이전의 사례에 따라 사람을 배정해 대기한 채 감시하게 하되, 변고가 있으면 밤에라도 곧 승정원 알리고 일이 없으면 이튿날 새벽에 승정원에 보고할 것,

하나, 봉수군(烽燧軍) 일은 신역(身役)이 가볍다고 해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들어가는데, 혹 먼 곳에 사는 사람으로써 충원함으로써 황혼을 이용해 살필 뿐이고 낮과 밤으로는 사람이 없으니 참으로 적당하지 못하다. 이후로는 모두 부근에 사는 사람으로써 충원함으로써 언제나 떠나지 않고서 살피게 하며, 그 곳 수령으로 하여금 살피게 하되 어기는 자가 있거든 수령도 아울러 책임을 물을 것.

하나, 낮에 알리는 것은 반드시 연기로 하는데 바람이 불면 연기가 곧바로 올라가지 않아서 살피기 힘들므로 이제 봉수가 있는 곳에는 모두 연통을 만들어 두게 할 것.

하나, 바람이 어지러워 연기가 흩어져서 살필 수 없을 경우에는 그곳의 봉수군이 달려와서 알리는 식으로 차례로 전달하도록 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