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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생활공간

반가구역
맞배사당
맞배사당

가묘 맞배사당

일반정보

산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며 살아가는 공간



조선시대에 이르러 주자학이 통치이념이 되면서 윤리규범서인 <<주자가례>>는 건축을 비롯한 생활 전반에 절대적인 가치 기준이 되었다. 위로는 국가의 종묘로부터 살림집의 가묘에 이르기까지 유교건축의 핵심에 제사공간이 놓이게 된다. 죽은 조상과 산 후손이 함께 존재하며, 살림집은 산자인 후손과 사자인 조상이 함께 거주하는 공간이다. 가묘에 모신 조상의 신주에 매일 제물로 음식을 바치기도 하고, 중요한 가정사의 대부분을 고하여 승인을 얻는 과정을 밟는다. 결혼, 출산, 과거, 관직, 여행 등 집안의 중요한 일이 생기면 반드시 조상에게 먼저 고하여, 마치 살아계신 부모님에게 하는 것처럼 예를 다 갖췄다.



집안 가장 귀한 자리에 세운 집



가묘는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하는 곳이다. 가묘의 배치형식은 사대부 집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침을 중심으로 동쪽, 즉 왼쪽에 배치되는 형식이 일반적이다. 그 다음 북쪽에 배치되는 형식도 보인다. 이러한 배치형식은 동쪽과 북쪽을 우위로 보는 전통 예법에 따른 것이다. 또한 영남지방의 가묘는 사랑채 가까이에 배치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이에 반해 호남지역에서는 사랑채와는 거리를 두고 오히려 안채와의 연계가 강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영남지역에서는 사랑채에서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많으나, 호남지역에서는 안채에서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전문정보

살림집에 공존하는 사자의 공간, 가묘(家廟)



고려 말기에 주자학이 수입되면서 <<주자가례(朱子家禮)>>가 규정하고 있는 조상숭배의 의례가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러 주자학이 통치이념이 되면서 <<주자가례>>는 건축을 비롯한 생활 전반에 절대적인 가치 기준이 되었다. 건축에서는 위로는 국가의 종묘(宗廟)로부터 살림집의 가묘(家廟)에 이르기까지 유교건축의 핵심에 사자(死者)의 공간이 놓이게 된다. 결국 죽은 조상과 산 후손이 함께 존재하여, 살림집은 산자인 후손과 사자인 조상이 함께 거주하는 공간이 된다.

살림집에 자리 잡은 사당 안에는 마지막으로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시게 된다. 매일 제물(祭物)로 음식을 바치기도 하고, 가정사의 중요한 대부분을 고하여 승인을 얻는 듯한 과정을 밟는다. 결혼, 출산, 과거, 여행 등 집안의 중요한 일이 생기면 반드시 조상에게 먼저 고하여 마치 살아계신 부모님에게 하듯이 예를 다 갖췄다.

사당은 이른바 가묘법(家廟法)에 의해서 중상류주택에서만 건축되었다. 해남(海南)의 윤고산(尹孤山) 고택처럼 대종가(大宗家)일 경우에는 2개 내지 3개의 사당까지도 건립하였다. 서민층에서는 예법뿐만 아니라 경제적 여건이 충분치 않았으므로 사당 건축은 볼 수 없다. 다만 제사를 지낼 때는 마루에서 위패(位牌)를 모시는 형식을 갖췄다.

조선시대에 집을 지을 때는 사당터를 먼저 정하여 다른 건물보다 높은 자리에 세웠으며, 주위에 담을 두르고 출입문을 달았다. 그 위치는 정침(正寢)의 동쪽으로 하는데, 이는 해뜨는 동쪽이 생명과 밝음의 상징으로 높은 자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사당은 주로 3칸으로 짓고 안팎에 단청(丹靑)을 입혀서 신성공간임을 표시하였다. 그리고 신문(神門)이라 하여 3칸 반퇴를 붙인 거대한 문을 따로 세운 집도 있었다. 사랑채의 가운데문은 종손(宗孫)만 드나들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은 옆문을 이용하도록 하여 종손의 권위를 높여 주기도 했다.

사당 안에는 4대 조상까지의 위패를 왼쪽에서부터 나란히 모시며 대가 지나면 맨 윗대의 위패를 그의 무덤에 묻는 것이 상례이다.

형편이 어려워 사당을 지을 수 없는 집에서는 사당벽장(祠堂壁欌)이라고 하여 대청 왼쪽 벽을 터서 작은 장을 꾸미고 이 안에 위패를 모셨다. 이것도 어려울 때는 나무상자를 벽에 걸어 두기도 했는데 이것이 벽감(壁龕)이다. 한편 서민가옥에서는 영남지방의 경우 조상당세기라 부르고, 호남지방에서는 물오가리라 부르는 쌀이 담긴 작은 단지를 시렁 위에 모시기도 했다. 이 단지는 주로 장손 집에 두며 위패처럼 조상 수대로 마련하거나, 1대에 1개씩 모두 4개를 놓기도 한다.

비교대상

예천권씨종가별당 사당



예천권씨종가별당은 보물 457호이며, 경북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 166번지에 위치한다. 사당의 가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3량가 건물로 각주를 구성했다. 기둥머리는 사파수로 치목해 휘어진 자연목을 기둥머리 부분에서 숭어턱으로 기둥위에 걸치고 그 밑으로 보아지가 기둥을 꿰뚫어 보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다. 그리고 천장은 연목 위에 산자엮기를 하고 앙토를 바르고 회반죽으로 마감한 연등천장이다. 창호는 정면 3칸의 중앙부인 어칸에 2짝과 좌우 협칸에 각각 한 짝 씩의 문을 설치했다.



광산김씨 사당



광산김씨 사당은 시도유형문화재 2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경북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산 28-1번지에 위치한다. 광산 김씨 중 오천리에 가장 처음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은 김효로와 증손자 김해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김효로가 죽은 지 2년 뒤인 1536년에 후손들이 뜻을 모아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오다가, 1592년 임진왜란 때 영남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 순절한 김해를 같이 모시고 있다. 사당의 구조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규모로 지어져 있고, 동쪽으로 사주문이 정면 1칸의 규모로 나 있다. 사주문의 사방으로 담장이 둘러져 있다.



충재종가 사당



충재종가 사당은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936번지에 위치한다. 충재종가는 권벌의 종가이고 그의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권벌은 연산군 때 벼슬에 올라 1507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 사성을 거쳐 도승지가 되고, 명종이 즉위하자 원상에 임명되었다. 봉화의 삼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사당에는 작은 협문과 협문을 통해 다시 사주문이 3칸이 구성되어 있고, 사주문 안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팔작지붕이 변형되어 있는데, 측면 지붕면을 작게 만들어 마치 맞배지붕과 흡사한 모양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