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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 사당
임청각 사당

임청각 사당

일반정보

근대사의 아픔을 보여주는 빛바랜 갈색



임청각은 안동 시내의 고건축을 대표한다. 낙동강변을 앞으로 보고 옆으로 길게 정침과 군자정, 가묘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져 있다. 군자정 연못의 동쪽으로 사당이 위치한다. 임청각 사당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남쪽으로 난 진입 계단을 올라 1칸짜리의 자그마한 협문을 통과해야 한다. 사당을 지배하는 것은 빛바랜 갈색이다. 철로의 기름먹인 침목이 세월을 바래 만들어내는 것과도 같은 색조가 기왓장, 서까래, 난간 모두를 지배한다. 사당 안은 텅 비어 있다. 위패는 다 치워지고 빈 마루방만이 남아 있다. 옛날에 번성했던 종가는 찾을 수 없고, 다만 주인 없는 빈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칸의 사당과 1칸의 사주문



임청각 사당은 남향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형식이다. 외형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전면에 툇간이 있는 모습이다. 내부 바닥은 모두 나무로 된 우물마루로 되어 있다. 천정은 연등 천장을 하고 있어 그 구조를 한눈에 알 수 있고, 곳곳에서 단청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사주문은 군자정 동쪽의 가파른 계단으로 올라서면 그 끝에 사당 출입문이 있다. 예전과는 달리 흙담장에서 사고석담장으로 보수되어 있다. 외부 모습은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다. 문지방은 전면 높이가 꽤 높아 자연석 디딤돌을 놓았다.

전문정보

고성 이씨 집안의 정신적 안식처, 임청각(臨淸閣) 사당(祠堂)



사당(祠堂) 영역은 임청각(臨淸閣)의 동북쪽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사당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정침(正寢) 마당과 군자정(君子亭)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임청각에서 공간상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다.

사당영역은 군자정과는 13도, 정침과는 12도 가량 틀어져 있어 부채꼴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당 영역의 모양은 앞이 좁고 뒤가 넓은 거꾸로 된 사다리꼴인데 다른 사당에서도 공간이 깊어 보이게 하기 위해 흔히 쓰는 건축 수법이다.

영역의 남쪽에는 진입 계단이 있고 계단 위에 협문(夾門)이 있다. 협문을 통과하면 마당이 있고 석축 위에 사당이 있다. 사당 뒤에는 다시 석축이 있고 그 뒤로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는 경사지로 되어 있다.

사당의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임청각이 유교적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계획된 것으로 볼 때 사당도 임청각이 건립(1519년)할 때 같이 계획되었으며 이후 여러 번 중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남향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사당 형식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에 전면은 퇴칸인 평면구성을 하고 있다. 정면 한 칸이 대략 8척으로 3칸이 모두 같으며, 측면은 어칸이 약 7.5척 전후 협칸이 대략 5척으로 어칸이 협칸보다 약 1.5배 크다.

전면석축의 높이는 1.2미터이고 사당 배면 석축의 높이는 0.7미터이다. 기단은 사당 전면쪽은 석축과 일체가 되어 있으며 나머지 삼면의 기단 높이는 0.3미터이다. 기단에서 약 0.9미터 떨어져 ㄷ자형으로 돌을 쌓아 배수로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전면 계단은 4단이며 올라갈수록 폭이 좁아진다. 뒷면도 경사지로 축대를 쌓아올렸다.

초석은 자연석 주초(柱礎)인데 정으로 대충 다듬어 방형에 가깝게 만든 것이다. 하인방 하부, 주초 사이는 전면 마루 밑만 터놓고 모두 막았다. 기둥은 단면이 방형이며 모가 접혀있으며 내부의 기둥은 생략되어 넓은 공간을 만들었다. 측면 중앙칸의 기둥은 고주로 되었으나 내진주는 상부 대들보에서 끊기고 대들보 위에 다시 동자주를 얹었다. 바닥은 모두 우물마루인데 마루널의 내부는 보 방향을 기둥위치에서 장귀틀로 연결하고 이것을 다시 도리방향에서 동귀틀로 삼분한 후 마루청판을 끼웠다. 배면과 측면의 벽체에는 인방과 벽선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되어 있다.

가구(架構) 형태는 5량집으로 어칸은 전면 평주에서 배면 평주까지 한번에 가로지르는 대량을 보내고, 측면고주는 중도리 높이에서 보를 보냈으며, 우주는 주심도리 높이에서 수평으로 보를 보내 고주 중간에 끼워 넣었다. 외부의 단청은 모두 벗겨져서 단청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내부의 장여나 도리, 보 등에 단청을 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군자정 동쪽의 가파른 계단에 올라서면 그 끝에 사당 출입문이 사주문(四柱門) 형태로 서있다. 예전 도면에는 흙담장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지금은 사고석담장으로 바뀌어져 있다. 평면형식은 앞과 옆이 각 1칸의 사주문으로 기둥은 각주이며 모접기를 하였고 측면에 샛기둥이 있다. 전면의 초석은 사다리꼴로 정다듬한 방초석이며 길쭉한 상부와 좀 더 넓고 정사각형에 가까운 하부로 구성하였다. 문지방은 전면 높이가 390밀리 정도로 꽤 높아 자연석 디딤돌을 놓았다.

스토리가이드

주제 : 희생 혹은 지독한 행위

인물 : 이준형(석주 이상룡의 아들), 이병화(석주 이상룡의 손자), 허은(이병화의 처), 학(머슴)

배경 : 임청각 가묘



줄거리

1942년 9월 침략자 일본의 승승장구 형세에 조국독립이 멀어짐에 절망하던 석주 이상룡의 아들 이준형은 부친유고 정리를 끝내고 가묘에 들어 선조들에게 아뢴 후 군자정에서 비장한 유시(遺詩)를 남기고 스스로 동맥을 잘라 자결했다.



이야기 자료

<자료1>

<<아직도 내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독립투사 이상룡 선생의 손부 허은 여사 회고록>>(구술 허은, 기록 변창애 / 정우사)195쪽-199쪽



1942년 9월 초이튿날, 존구(尊舅) 이준형(李濬衡)께서는 예순일곱을 일기로 스스로 생을 하직하셨다. 남편은 만주 가고 없을 때였다. (중략) 시국은 당신 뜻대로 되지 않고 오히려 일본은 점점 득세하여 동남아를 자꾸 점령해가니 독립의 희망은 희박해졌다고 판단하셨던가 봐. (중략)

아들 보내고 보름만에 그랬다. 석주어른 유고 정리하던 일 마무리 해 놓고 목의 동맥을 자르고 유명을 달리하는 길을 택하셨다. 참 비장한 내용의 유서를 남기셨다. (중략)

학이가 다급히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내려가 보니 어머니가 마루 끝에 앉아서 “정자 좀 가봐라. 한번 들어가더니 소식이 없다.”고 하셨다. (중략)

뛰어가 보니 문을 안으로 꼭 걸어 잠귀 놓은 채 기척이 없었다. 아무리 해도 안 열렸다. 건너 일가집 친척을 오시라 해서 장도리, 칼 등으로 억지로 뜯고 들어갔다. 피가 세숫대야로 퍼다 부은 것같이 흥건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중략)

그토록 소원하시던 조국 독립도 못 보신 채, 외아들의 행방도 모르신 채 절망과 좌절에서 헤어나지 못하시고 스스로 한 많은 삶을 끝내신 것이다.

안동으로 전보 치고 전 만주 하얼삔으로, 오상현으로 전보를 쳤다. 부친의 죽음도 모르고 있을 남편한테 알리는 일이 우선 급했다. (중략)

어디서 받아보았는지 안동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왔다. 차에서 내리는데도 연방 전보가 자기 손에 들어오더란다. 옥살이 할 때의 고문 때문에 걸음을 잘 못 걸으니 미리 가마를 준비해서 교군 들려서 안동역에 내보냈다. 이미 돌아가신 지 4일이 지나고 도착했다.



<자료2>

<<안동의 독립운동사>>(김희곤/ 안동시) 193쪽



그(이상룡)는 1911년 2월 5일 친척들에게 주연을 베풀어 자신의 뜻을 알리고 뒷일을 부탁했으며, 다음날 일찍 가묘에 예를 올리고 거국시(去國詩)를 읊고 망명길에 올랐다 (중략) 그의 동생 봉희(鳳羲)를 비롯해, 아들 준형, 손자 병화, 조카 문형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상룡은 압록강을 건너면서 비장한 심정을 다음과 같은 시로 읊었다.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워 나의 살을 에는데

살은 깎여도 오히려 참을 수 있고

창자는 끊어져도 차라리 슬프지 않다.

옥토 삼천리와 이천만 백성의 극락 같은 부모국이

지금 누구의 차지가 되었는가.

차라리 이 머리 잘릴지언정

어찌 내 무릎을 꿇어 그들의 종이 될까보냐.

집을 나선 지 한 달이 못되어 압록강 물을 건넜으니

누가 나의 길을 더디게 할까 보냐

나의 호연한 발걸음을’



<자료3>

<<안동의 독립운동사>>(김희곤/ 안동시) 401쪽



안동지방의 계몽운동을 이끌어낸 이상룡, 유인식, 김동삼 등은 모두 퇴계 학통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보수 유림계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으나, 그 보수를 뚫고 혁신을 일궈낸 사람도 역시 퇴계 학통을 잇는 유림들이었고, 이를 혁신 유림이라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