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읍성_읍성형1
관련시설
성곽_해미읍성
- 성곽_해미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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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진남문), 서문(지성루), 동문(잠양루), 치성과 포루 포함. 완전한 보존상태
- 일반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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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을 지키던 대표 연안 읍성
현재의 해미읍성은 성종 22년(1491)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현 읍내리의 평지에 돌로 세워졌다. 본래 이곳은 고려 때부터 흙으로 쌓은 토성이 있었는데, 태종 18년(1418) 병마절도사영이 설치되면서 돌로 발전하였다. 효종 때에 북벌책을 내세우면서 전국의 읍성과 성곽을 정비할 때 호서좌영을 해미읍성에 두고 군사를 관장하는 영장을 두어 서해안 방어의 임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1579년에 병영 군관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 곳은 흥선대원군 때 수많은 천주교인을 박해해서 천주교의 순교성지가 되었다. 일제시대 이후 폐성이 되어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었으나 최근 원형을 회복하고 있다.
평지에 세운 원형 성곽
해미읍성은 북쪽에 야산이 있을 뿐 전체적으로 낮은 평지에 원형으로 세워졌다. 본래 동․서․남의 3대문이 있었고, 병영의 역할을 겸하는 동헌 1동, 객사 2동, 옹성 2개소, 포루 2동, 총안 380개소, 수상각 1개소, 신당원 1개소 등 매우 큰 규모였다고 한다. 남쪽을 지키는 문이라는 뜻의 진남문이 정문이고 동서문에서 들어오는 T자형의 가로가 형성되었다. 특이하게 객사와 동헌이 북쪽의 좌우에 배치되어 있고, 동쪽 문 안쪽에 감옥과 호야나무가 있으며, 서쪽 문의 길가에 장터가 자리잡고 있다. 서문 밖에는 돌로 만든 널다리가 놓여져 있고, 적을 방어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해자가 서문밖 쪽으로 나 있다.
- 전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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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과 행정의 전초기지, 해미읍성(海美邑城)
해미현(海美縣)은 고려시대 때는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余美縣)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종 7년(1413)에 두 현을 통합하여 정해현에 치소(治所)를 두었다. 읍성은 고려시대 때에 세운 토성(土城)을 바탕으로 태종 18년(1418)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이 설치되면서 석성(石城)으로 세워졌다. 병마절도사영이 효종 2년(1651)에 청주로 옮길 때 까지 200여 년 동안 서해안 군사 요충지로서 중심 역할을 했던 곳이다. 지금의 읍성은 성종 22년(1491)에 쌓은 형태이다. 선조 12년(1578)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서 근무한 기록이 남아있다.
근대사에 들어서면서 여러 사건의 중심지가 되는데 동학혁명(東學革命)운동 당시 일본군과 관군들이 주둔하고 있던 홍주읍성을 공격하기 위한 전초기지였다. 천주교 박해성지로도 유명한데 1866년 병인년, 즉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절정을 이루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덕산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을 독일인 옵페르트가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수많은 천주교인을 해미읍성 안의 회화나무에 묶어 고문과 처형을 자행 하였다. 현재 정문을 들어서서 약 60미터지점에는 천주교 순교 기념비와 천주교인을 처형한 회화나무와 사형대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성에도 불구하고 해미읍성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면사무소를 비롯한 관공서와 해미초등학교, 그리고 민가 터를 비롯한 경작지로 이용되면서 많은 교란과 훼손을 입게 되었다. 그러다가 1963년에 국가 사적 제 116호로 지정 받아 현재까지 관리를 받고 있다.
성곽의 둘레는 약 1,800미터(성곽 기저부 총연장 길이는 1,620미터), 성 높이 5-6미터, 성 안의 총넓이는 203,164제곱미터이다. 성밖은 석축(石築)으로 쌓고, 성 안쪽은 흙으로 내탁을 하였다. 본래는 동, 서, 남의 3대문이 있었고, 옹성(甕城)이 2개소, 객사(客舍) 2동, 포루(砲樓) 2동, 동헌(東軒) 1동, 총안(銃眼) 380개소, 수상각(水上閣) 1개소, 신당원(神堂院) 1개소 등 매우 큰 규모였다고 한다.
읍성의 정문인 진남문(鎭南門)은 홍예(虹霓)로 된 석문(石門)에 팔작(八作)지붕의 단층으로 되어있으며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동문인 잠양루(岑陽樓)와 서문인 지성루(枳城樓)는 최근에 복원하였다. 요충지인 해미읍성을 축성할 당시 충청도의 각지방 장정들이 동원되었으며, 그 기록이 현재도 정문인 진남문 아래 성벽에 공사구간을 지방명으로 표시한 흔적이 남아있다.
북서쪽에는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성밖에 깊이 판 해자(垓子)의 흔적도 확인된다. 이 해자와 성벽사이의 공간에는 부분적으로 탱자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이 탱자나무에 대한 기록은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잘 남아 있다. 성안에는 병영을 겸하는 동헌(東軒) 9칸을 비롯해 내아(內衙), 객사(客舍), 내창(內倉) 등 33칸이 있었으나 1930년대 동, 서문의 누각은 없어지고 아사는 면사무소가 되었으며 객사는 학교로 바뀌었으나 지금은 모두 밖으로 이전하였다.
- 스토리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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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지독한 행위
인물 : 대원군, 해미현감, 천주교인
배경 : 해미읍성내
줄거리
병인년(1866년) 대원군은 덕산에 위치한 그의 부친 남연군의 무덤을 독일인 옵페르트가 도굴하려다 미수에 그치자, 그 보복으로 해미에서 수많은 천주교인을 처형한다. 이때 천여 명의 천주교인이 죽음을 당하는데, 나무에 철사줄로 목을 매달고 심지어는 돌에 패대기질 쳐 죽이기도 하고, 해미천변에 생매장을 하기도 한다.
이야기 자료
<자료1>
<<조선왕조실록>> 정조 037 17/06/21(임오) / 호서 암행어사 이조원이 해미․홍주 진영의 폐단을 알리고 해미 진영 혁파를 청하나 불허하다
호서 암행 어사 이조원이 돌아와서 아뢰었다.
“해미는 홍주(洪州)와 지역이 서로 인접해 있어 장교와 군졸들이 드나듦으로 백성들이 그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해미 현감이 겸하고 있는 영장의 직임을 혁파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왕이 대신이 품처할 때까지 기다리도록 명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우의정 김이소가 아뢰었다.
“홍주와 해미에 모두 진영을 둔 것은 당초 제정하여 둔 의도가 있었을 것이고 또 5영(營)의 제도에서 한 곳도 뺄 수 없으니, 혁파하자는 한 가지 일은 가벼이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자료2>
<<조선왕조실록>> 숙종 049 36/10/17(무인) / 이조 판서(吏曹判書) 최석항(崔錫恒)이 홍복산, 북한산 축성의 일과 연해 방비에 대해 상소하다
“우리 나라는 수전(水戰)이 본래 장기가 아닌데, 양서(兩西)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배치한 전선(戰船)이 모두 퇴선을 개조한 것이므로, 썩어서 쓸모가 없고, 게다가 수군이 산군(山郡)에 많이 있으므로, 번포(番布)를 거두어 대가를 지급하여 대신 군대살이를 하게 하니, 만약 급한 사태가 생기면 장차 무엇을 믿겠습니까? 신의 뜻은, 연안 지역 군현에 읍성이 있는 경우에는 그 허물어진 곳을 수축하게 하고, 요충지대에 있으면서도 성이 없는 경우에는 또한 방편대로 설축(設築)하여, 군졸 등을 연습시켜 신지(信地)를 굳건하게 지키게 하면, 적(賊)이 비록 와서 침범한다 하더라도 제멋대로 육지에 올라 분돌(奔突)하지는 못할 것으로 여깁니다. 물에 익숙하지 못한 군사로써 쓸모없는 배를 가지고 배를 말처럼 부리는 적을 막는 것이, 어찌 성을 의지하여 성첩(城堞)을 지키고 편안함으로써 피로한 적을 기다리는 것만 같겠습니까?”
<자료3>
<<조선왕조실록> 세종 049 12/09/24(임술) / 최윤덕이 충청도에서 읍성을 건조할 적처를 아뢰다
도순찰사 최윤덕(崔閏德)이 아뢰었다.
“충청도 비인(庇仁)과 보령(保寧)의 두 현은 해구(海寇)들이 가장 먼저 발길을 들여놓는 지대인데, 비인의 읍성은 평지에 위치하여 있고, 보령의 읍성은 높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어 모두 성터로 맞지 않습니다. 또 잡석을 흙과 섞어서 축조한지라 보잘 것이 없고 협착한데다가 또한 우물과 샘마저 없으니, 실로 장기간 보전할 땅이 아닙니다. 비인현 죽사동(竹寺洞)의 새 터와 보령현 고읍(古邑) 지내리(池內里)의 새 터는 삼면이 험준한 산을 의지하고 있는데다가, 그 내면도 넓고 샘물도 또한 풍족하여 읍성을 설치하기에 마땅합니다. 뿐만 아니라, 본현과의 거리도 불과 1리 밖에 되지 않아서 진실로 옮겨 가고 오는 폐단도 없사오니, 윗항의 새 터에 본도 중에서 벼농사가 잘된 각 고을에 적당히 척수(尺數)를 안배해 주어 10월부터 역사를 시작하게 하고, 감사와 도절제사로 하여금 그 축조를 감독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