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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목조건축물

상류주택
양진당
종가_양진당

보물 제306호,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724, 북촌의 대표 종가

일반정보

하회마을의 대종가



양진당은 하회마을의 대종가로 하회마을 내에 위치한다. 하회마을은 풍산 유씨들이 사는 동성마을로 중요민속자료 제122호로 지정된 민속마을이기도 하다. 남쪽으로 흐르던 낙동강이 하회에 이르러 큰 원을 그리며 S자를 거꾸로 놓은 듯이 휘돌아 가기 때문에 ‘물돌이동’이라 했다. 풍수지리상으로 태극형 혹은 산태극 수태극이라고 한다. 또 하회는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연화부수형이라 하여 사람이 살기 좋은 곳으로 여겨진다. 마을은 중앙을 가로지르는 큰길을 중심으로 크게 북촌과 남촌으로 나뉜다. 입구에서 길을 따라 하동고택, 남촌댁, 북촌댁, 삼신당, 양진당, 충효당 순으로 놓여 있다.



口자형 뜰집에 당당한 사랑채를 붙인 종가집



양진당은 口자형 형식의 건물이 나란히 가로로 두 개 붙어있는 형상을 갖추고 있다. 바깥채와 안채가 가로로 붙어있는 것이다. 그 각각의 건물은 따로 들어가는 입구를 가지고 있고, 또 서로 통하는 측문도 달려 있다. 안채의 한가운데에는 거의 정사각형 모양의 안마당이 있다. 안마당의 한가운데는 사각의 대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 위에는 크고 작은 독들이 쭉 늘어서서 대갓집의 살림살이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 우물마루 대청을 좌우로 안방과 건넌방이 있다. 홑처마이며 지붕의 양측에는 합각이 있으나 팔작집이 아니고 맞배집이다.

전문정보

하회마을 종가집 양진당(養眞堂)



양진당은 하회마을의 대종가이다. 이 양진당은 하회마을 내에 위치한다. 안동시내에서 예천방면으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하회마을은 풍산 유씨들이 사는 동성마을로 중요민속자료 제122호로 지정된 민속마을이기도 하다. 현재 107가구 230명이 살고 있으며 290동의 건물이 있다. 남쪽으로 흐르던 낙동강이 하회에 이르러 큰 원을 그리며 S자를 거꾸로 놓은 듯이 휘돌아 가기 때문에 ‘물돌이동’이라 했다. 풍수지리상으로 태극형 혹은 산태극 수태극이라고 한다. 또 하회는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연화부수형이라 하여 사람이 살기 좋은 곳으로 여겨진다. 마을은 중앙을 가로지르는 큰길을 중심으로 크게 북천과 남촌으로 나뉜다. 입구에서 길을 따라 하동고택, 남촌댁, 북천댁, 삼신당, 양진당, 충효당 순으로 되어 있다. 이 길을 따라가면 양진당을 만날 수 있다.

하회마을의 종가는 양진당(겸암종가謙菴宗家)과 서애 유성룡(柳成龍) 종가이다. 하회마을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곳이 이 두 종가이다. 유운룡(柳雲龍)과 유성룡은 유종영(柳仲落)의 두 아들이다. 유중룡은 평생 크고 작은 벼슬을 거치기도 했지만, 이 두 아들을 낳아 기름으로써 풍산 유씨를 단숨에 최고 명문의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사실 풍산 유씨는 유운룡과 유성룡의 후손들로 대표된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겸암 유운룡은 중종 34년(1539)에 하회에서 출생한다. 그의 자는 응견이고, 차음의 자는 이득이다. 그는 6세부터 학업을 시하여 15세에 이르면 소학, 사서, 그 밖의 여러 경과 사에 통달하는 경지에 이른다. 그는 16세에 참봉 용의 딸, 철성 이씨를 아내로 맞이한다. 17세에 퇴계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익히기 시작한다. 29세에 그는 입암의 위쪽 경치 좋은 곳에 겸암정사(謙菴精舍)를 지었는데, 그 편액은 퇴계 이황이 써 준 것이다. 이로써 그는 스스로 겸암을 자신의 호로 사용하게 된다. 이즈음에 그는 과거 보는 일과 고요하게 마음을 닦는 일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다. 겸암은 38세에 벼슬길에 나서 의금부 도사를 제수 받았다. 그러나 그해 6월 바로 병으로 벼슬자리를 내놓고 귀향을 한다. 이후 43세 때 안동의 복호를 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당시 안동은 임하에 살던 신복이라는 자가 그 어미를 살해하는 일을 저질로 부에서 현으로 강등된다. 그러므로 겸암은 안동을 다시 부로 승격시켜달라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이 때 겸암의 상소가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의금부 경력으로 승차하게 되어 다시 벼슬길에 나선다. 이때 벼슬살이는 약 2년간 계속한다. 그의 벼슬은 통정대부 원주목사에 이르고, 그에게는 증직으로 가선대부 이조참판이 주어진다. 63세 되던 해, 1601년 타계하여 천등산 기슭에 묻힌다.

<구가중수기>에 의하면 양진당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20년대에 사랑채를 중수하였고, 1650년 10월 29일에 안채 및 행랑채의 상량을 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옛 설계를 상고하여 설계되었다고 적혀 있어 지금의 건물 배치와 크게 변형되지 않았으리라 추측하고 있다.

겸암종가는 口자형 형식의 건물이 나란히 가로로 두 개 붙어있는 형상을 갖추고 있다. 바깥채와 안채가 가로로 붙어있는 것이다. 그 각각의 건물은 따로 들어가는 입구를 가지고 있고, 또 서로 통하는 측문도 달려 있다.

안채의 한가운데에는 거의 정사각형 모양의 안마당이 있다. 안마당의 한가운데는 사각의 대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 위에는 크고 작은 독들이 죽 늘어서서 대갓집의 살림살이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마당에 서서 보면, 높이 보이는 마루의 끝 쪽으로 처마 끝에 난간을 달아매고 그 위에 30개의 1인용 반들이 죽모로 올려져 있는 것이 보인다. 아직도 제의가 있을 때 사용하는 반이라 한다. 그것은 아직도 이 집안에서는 조상숭배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의례들이 삶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서쪽에는 밑에 빈 공간을 두고 위에 다락방 같은 형식의 마루방이 가설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다락방의 마루 끝은 높은 뜨락의 한 쪽과 단층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깨끗하고 반듯하게 유지되어 있다.

양진당을 요소별로 자세히 보면 다음과 같다.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 우물마루 대청을 좌우로 안방과 건너방이 있으며 안방의 서측에는 반빗간 계열의 3칸짜리 부엌이 크게 나 있고, 부엌 위의 중층은 마루를 깔았다. 대청은 오량집으로 되어 있고, 정침의 부분에는 1고주 5량집의 형태이지만 고주를 세우지 않고 평주를 세워 그 위의 대량과 퇴량을 맞보로 걸었다. 홑처마이며 지붕의 양측에는 합각이 있으나 팔작집이 아니고 맞배집이다. 안채의 천정은 연등천정으로 제형판대공을 사용하였으며 부재의 가공은 단순하고 강직하게 처리하였다. 보는 자연의 목재를 부분적으로 가공하여 사용하였고 보의 머리는 상부를 양측에서 빗 깎아 만들었고, 마구리면을 수직으로 처리하여 강직한 힘을 보여주고 있다. 안채 대청의 후면에는 판장문을 달았으며 상부와 하부의 울거미에는 사랑채 대청의 판장문에 설치된 것과 같이 영이 있는 흔적이 남아 있어 보수 시 문짝이 변형되었거나 울거미를 바꾸어 설치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좌측면의 한 칸은 안채와 연결되어 정면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좌측의 4칸은 방을 드리고, 온돌을 설치하여 사랑방과 서재로 사용하고 6칸의 대청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사랑채의 대청은 연등천정이나 충량 상부의 외기부분에는 우물반자가 설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높은 자연석 기단 위에 주초를 하였으며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기둥의 상부에는 익공계의 두공이 있으나 쇠서의 형상을 간략화하여 둥글게 굴렸다. 주두를 올리고 두공을 설치하여 주심도리를 받치게 하였으며 기둥 사이에는 창방을 두었다. 창방 위에는 방형의 간략화된 화반을 설치하고 기둥의 위에는 두공첨자를 설치하여 그 위에 소로를 얹고 장여를 받치도록 하였다. 두공첨자는 직선으로 모나게 가공하여 그 수법이 간결하고 힘차다. 특이한 것은 화반과 첨자에 부용화를 세김한 것이다.

사랑채 전면의 방에는 궁판 없이 띠살문을 달았고, 대청의 나머지 칸에는 궁판이 있는 사분합 띠살문을 설치하였다. 대청의 우측과 배면에는 판장문을 달았으며 사랑방과 대청 사이에는 장지문을 달았으나, 유사시 들어올려 개방적인 공간을 만들 수 있도록 설치하였다. 사랑채의 전면과 우측면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으나, 전면의 툇마루에는 계자 난간이 설치된 반면, 우측면과 배면에는 난간 없이 절제된 면모를 보여준다.

스토리가이드

주제 : 구출

인물 : 동생 유성룡, 형 유운룡, 서모, 서모의 아들, 짚신 심는 노인과 심부름하는 소녀

배경 : 양진당



줄거리

유성룡 형제의 아버지는 칠십에 젊은 여인을 재취로 맞아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장성하자 형제는 자신들이 장가보내기로 한다. 이때 유성룡이 추천하는 서울 대갓집 딸을 거절하고 형이 짚신장수의 딸로 혼처를 정함으로써, 두 사람 사이가 소원해지게 된다. 혼례 당일 새벽 새신부가 구미호를 잡아서 나타난다. 형 유운룡은 새어머니가 여우이고 서자 동생이 구미호임을 알았지만, 차마 직접 아버지의 배필과 혈육을 죽일 수 없어서 예사 사람이 아님을 간파한 짚신장수의 딸을 택했던 것이다.



이야기 자료

<자료1>

<설화> <<안동시사3-안동의 민속과 문화>>, 안동시사편찬위원회, 1999



하회마을에 서애대감의 형인 겸암선생이 있었는데 남 보기에는 모자라는 듯이 보여도 실제로는 미래를 내다보고 길흉을 점칠 줄 아는 도인이래, 기인이지.

그때 마침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왜적이 조선을 쳐들어오기 위하여 칼을 갈고 있었는데, 그래가 세상이 온통 어지러워졌어. 그래 한날은 겸암선생이 서애대감을 찾아와서는 사흘 후에 너를 죽이기 위해서 일본서 자객이 찾아올 것이니, 니는 동네 아이들을 불러서 가등청청 나오네 라는 노래를 부르도록 시켜라. 그랬거든. 다른 사람하고 다르게 평소에 겸암선생을 잘 아는 서애선생이 생각하기를 필시 뭔가 연유가 있어서 이러는갑다. 이래 생각을 해서 마을 아이들을 불러 모아서 '가등청정이 나오네'라는 노래를 부르도록 시켰어.

그리고 며칠 후에 참말로 가등청정이 보낸 자객이 하회마을에 왔는데,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들이 '가능청정이 나오네'라고 노래를 부르거든. 그래 그 소리를 들으니 가슴이 섬찍한게 도저히 마을을 염탐할 용기가 안나는 게라.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오는 것을 아이들이 어떻게 알고 저런 노래를 부르지?' 부쩍 의심이 들었어요. 그래서 첩자가 아이들인데 누가 가르쳐 준 노래냐고 물어보았어. 아이들이 대답하기를 서애대감이 가르쳐주었다고 말하니, 첩자가 서애대감이 참 훌륭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이런 사람이 조선에 있어서는 일본인데 큰 방해가 될 것 같으니 내가 고만 없애야 되겠다 하고 마음을 먹었어.

그리고 며칠이 지났는데 또 겸암선생이 서애대감을 불러서는 내일 자객이 와서 니하고 바둑을 두자고 할 터이니. 니는 거울 앞에 앉고 자객을 거울 밑에 앉쳐라. 그리고 내가 뒷방에 바둑 놓을 자리를 거울에 비쳐 줄 테니 니는 그냥 거기에 두기만 하면 된다. 이래 말하거든. 조금 있다고 보니 참말로 자객이 와서 서애대감인데 내기 바둑을 두자고 청하거든. 그래서 서애대감이 좋다고 하면서 겸암선생이 시키는 대로 거울 앞에서 바둑을 두기 시작했어. 한 반쯤 바둑을 두었는데 자객이 생각해보이 도저히 안돼겠그던. 그래 고마 제가 졌습니다. 하고는 음식대접도 안 받고 부랴부랴 달아나 버렸다 그래.

이 일로 인해가 임진왜란 때 우리 안동 땅은 왜군들이 약탈하지 못하고 피해갔다고 그래. 그리고 그때 부른 '가등청정이 나오네'가 변해가 '쾌지나 칭칭나네'라는 민요로 바뀌어 전해졌다고 그래.



<자료2>

<<조선왕조실록>> 선조 097 31/02/02(정사) / 송응순이 명성 없는 유운룡을 승지에 추천한 관원들을 추고하도록 청하다



정언 송응순(宋應洵)이 와서 아뢰었다.

“정원(政院)은 임금 가까이 있는 직임으로 그 선임(選任)이 지극히 중요합니다. 진실로 재행(才行)과 명성이 평소 드러난 자가 아니면 음관(蔭官)으로서는 이 선임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은 오래된 일입니다. 그런데 유운룡(柳雲龍)은 별로 뛰어나게 일컬을 만한 명성이 없는데도 누차 승지(承旨)에 의망(擬望)되었으니, 후설(喉舌)의 중한 자리를 신중히 가리지 않은 죄가 큽니다. 물정(物情)이 매우 온편치 못하게 여기고 있으니, 이조에서 의망한 때를 전후하여 재직했던 당상(堂上)과 색낭청(色郞廳)을 아울러 추고하소서.”

왕이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