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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건축물

서민주택
까치구멍집
민가 까치구멍집(박분섭 가옥) 가상복원_0 돋보기
까치구멍집

안동시 와룡면 위치. 정식 명칭은 박분섭가옥. 지붕 용마루 양쪽에 구멍이 난 안동 고유 민가

일반정보

자연의 위협에 대응한 폐쇄 구조의 초가



까치구멍집은 산에 둘러싸여 있어서 날씨도 춥고 해도 빨리 지고 짐승의 위협도 항상 있는 경북 북부지방과 강원도 일대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자연환경이 가혹할수록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집은 폐쇄적일 수밖에 없다. 즉 까치구멍집은 겹집형태에서 집의 내부에 외양간을 두어 사람과 소가 함께 사는 주거형태이다. 우선 겹집구조는 방과 방이 앞뒤로 등을 맞대고 배열되어 있는 형태로 벽체가 한랭한 외기에 면하는 것을 막아주는 평면형태이다. 또 지붕에 낸 까치구멍은 외양간에서 나는 냄새와 부엌에서 발생하는 연기를 바깥으로 배출하기 위해 용마루 끝에 구멍을 뚫은 것을 말한다.



안동의 특이한 민가, 까치구멍집



경북 북부지역에 분포한 까치구멍집 중의 하나인 박분섭가옥은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면서 와룡면 가류동에 있던 것을 현재의 안동 민속촌으로 옮겨온 것이다. 앞칸 가운데 봉당이 있고 좌우에 외양간과 부엌이 있다. 봉당 뒤에 마루가 있고 그 양 옆으로 작은방, 큰방이 있다. 작은방 뒤에는 도장방이 있는 겹집이다. 부엌 부분이 약간 앞으로 돌출되어 있고, 외양간은 왼쪽으로 돌출되어 있다. 집 벽체의 전면에는 판벽을 대었다. 생활을 다양하게 할 수 있도록 내부에 구조를 잘 배열하였다. 부엌과 봉당 사이의 간벽에는 부엌과 마루, 봉당, 외양간을 동시에 밝히 수 있는 등불 홈벽이 뚫려 있다.

전문정보

내부 결속력이 강한 내부지향적인 주거형태, 까치구멍집



까치구멍집은 이른바 겹집의 일종이다. 겹집은 집안에서 모든 작업을 할 수 있는 유용한 구조이다. 대문만 닫으면 외부의 적이나 맹수를 막을 수 있고, 눈에 길이 막혀도 집안에서 취사와 난방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출입문 하나에 창문도 없기 때문에 집안에 연기가 차고, 외양간에서 냄새가 나면 빼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지역의 겹집들은 대체로 지붕에 까치구멍이라 불리는 구멍을 뚫었다. 까치구멍을 만들 때는 지붕 용마루 양쪽 끝에 구멍을 내서 이엉을 얹는다. 짚을 안으로 잘 말아 넣어 연기는 빠져나가되, 빗물이 들지 않도록 구멍의 벌어진 형태나 각도 등을 매우 세심하게 배려해서 만든다.

까치구멍 외에도 까치구멍집이 가지는 특징은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폐쇄적이라는 것, 외양간이 사람의 방과 한 지붕 아래에 같이 있다는 것, 겹집의 형태를 띤다는 것 등이다. 또 벽면의 앞면은 너와집처럼 산간에서 구하기 쉬운 나무판자를 대었고, 내부의 조명은 코쿨이나 우등불로 밝혔고, 봉당이 있다. 봉당은 마루가 될 자리를 흙바닥 그대로 둔 곳으로 오늘날의 현관과 방안으로 이어지는 통로에 해당되는데, 방이나 마루보다 1미터쯤 푹 꺼져 있다.

까치구멍집은 주로 폐쇄적인 겹집 형태에서 나타난다. 폐쇄적인 주거는 산간지역에서 외부환경으로부터 가족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주거형태로 한 건물 안에 모든 생활공간을 집중시키려는 경향이 강하다.

안동지역에 분포하는 까치구멍집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하나는 전면에 마굿간-봉당-정지가 일렬로 배치되는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마구-봉당은 일렬이고, 정지는 반 칸이나 1칸 정도 앞으로 돌출된 형태이다. 경북 북부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까치구멍집은 독특한 평면구성으로 인해 마루중시형 겹집, 안동형 복판봉당집, 여간형식, 두루지기집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특히 까치구멍집은 제주도 집과 함께 ‘지역형’으로 불릴 만큼 지역적 특성이 강한 주거형태이다.

까치구멍집은 주거형태가 폐쇄적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함경도의 정주간이 있는 주거나 영동지방의 田자집, 그리고 태백산 주변의 두렁집과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외관의 폐쇄성과 달리 평면구성에 있어서는 안방-마루-건넌방으로 이어지는 중부형 ㄱ자집과 유사하다.

까치구멍집은 원채, 모채 그리고 변소나 잿간 같은 부속 건물로 구성된다. 원채의 평면은 여칸 겹집이고, 모채는 一자형이 일반적이다. 까치구멍집은 한 건물에 필요한 모든 공간을 집중시키기 때문에 규모가 작은 변소나 잿간 이외에 특별한 시설은 없다.

까치구멍집 주거형태의 가장 큰 특징은 폐쇄성에서 찾을 수 있다. 주거공간을 폐쇄적으로 만드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주거공간을 담으로 둘러쌈으로써 폐쇄적으로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건물 외관 자체를 폐쇄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까치구멍집을 비롯해 강원도와 경북 북부지역의 폐쇄적인 민가는 건물 외관을 폐쇄하는 경우에 속한다. 건물 외관을 폐쇄하는 경우에는 주거 내부로 통하는 문을 최대한 줄여 외부에서는 접근이 쉽지 않지만, 내부는 개방되어 있어서 전체적으로 외폐내개(外閉內開)형을 이룬다. 즉, 까치구멍집은 외부적 환경에는 배타적이어서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으면서, 내부적으로는 개방해 내부적 결속력이 강한 내부지향적인 주거형태이다.

이처럼 외부에 대해 주거를 폐쇄시키는 것은 외부의 환경으로부터 가족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외부환경으로부터 주거공간을 효율적으로 보호하는 방법은 주생활에 필요한 모근 공간을 한 건물 안에 집중적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주거공간을 분화해 여러 채를 두면 폐쇄성이 약화되어 외부 환경으로부터 가족과 재산을 보호하기 어렵다. 따라서 폐쇄적인 주거에서는 가능한 부속건물을 두지 않고 하나의 건물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까치구멍집의 원채 내에는 취침공간이나 취사 및 가사작업 공간을 물론 수장 공간과 사육공간까지 배치되어 있다. 즉, 생활에 필요한 모든 공간을 원채 안에 집중시킴으로써 외부로 나가지 않아도 생활이 가능하다. 특히 사육공간인 마구를 주거 내부에 두는 것은 폐쇄적인 주거형태의 가장 큰 특징이다.

스토리가이드

주제 : 위기

인물 : 며느리, 시아버지, 호랑이

배경 : 마을 근처의 산



줄거리

어느 가난한 집의 효성스런 며느리가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는 시아버지를 찾으러 아기 업은 채 나섰다가, 산 속에서 술 취해 잠든 시아버지를 해치려는 호랑이를 발견했다. 며느리는 아기를 내밀며 시아버지를 들쳐 업고 집으로 달려왔다. 놀랍게도 새벽에 이웃 김부자 집 낟가리 위에서 곱게 자는 아이가 발견되었다. 며느리의 효성에 감탄한 김부자가 준 낟가리의 벼 백 섬을 잘 관리해 집안을 일으켰고, 아이는 장성해 큰 장군이 되었다.



이야기 자료

<자료 1>

<<조선왕조실록>> 영조 011 03/03/17(갑진) / 검토관 황재가 사치하는 폐단에 관하여 말하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거행하였다. 검토관 황재(黃宰)가 사치하는 폐단에 관하여 아뢰었다.

“시정(市井)과 여항(閭巷)에서 그 폐단이 더욱 심하여 한없이 사치하게 꾸며 법도가 없이 참람합니다. 옛사람의 말이 ‘사치하는 폐해는 천재(天災)보다 심한 것이라’고 했는데, 어찌 참람하게 사치하도록 맡겨 두고 금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어서 엄하게 금하기를 청하니, 왕이 말했다. “사치하는 폐단이 날마다 하루가 다르게 심해지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느냐? 농민은 추울 때 땅을 갈고 더울 때 김을 매야 하며, 길쌈하는 부녀자는 일찍 일어나 실을 뽑고 밤에 베를 짜느라 그 노고가 또한 너무도 심한데,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베를 다 짜고 나면 공사(公私)의 포흠(逋欠)을 한꺼번에 받아가므로 마침내 자신의 소유가 되지 못하여 먹는 것은 오직 조강(糟糠)이요 입는 옷은 오직 때 묻고 헤어진 것뿐이라는 것이, 바로 황명성조(皇明聖祖)가 말한 바와 같을 것이니, 어찌 가련한 일이 아니겠느냐? 내가 매양 시골의 곤궁한 백성을 생각하노라면 밤중에도 잠이 오지 않으며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게 된다. 사대부들도 법도에 벗어나게 사치하는 사람이 또한 많이 있기는 하지만, 시정 사람들에 있어서도 가만히 앉아 놀며 좋은 음식만 먹고 고운 옷에 좋은 신을 신고 살면서, 의복과 음식을 참람하게 사치하기를 다투어 하고 있으니, 이러한데 농민들이 어떻게 곤궁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복(服)을 벗은 뒤부터는 조정에 임할 적에 비록 진의(袗衣)를 입기는 하지만 평상시에 있어서는 일찍이 지나치게 사치하는 짓을 하지 않는데도 사치하는 풍습이 이러하니, 이는 내가 인도하여 통솔하기를 잘하지 못한 소치가 아닐 수 없다. 임금이 검소하는 덕이 있은 다음에야 백성이 보고서 감동하는 교화가 있을 것이니, 진실로 몸소 실행하는 덕이 없으면서 한갓 법으로만 금단하려고 하면 또한 폐단이 없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자료 2>

<<조선왕조실록>> 광해 116 09/06/04(정유) / 예조 정랑 유약을 보내어 곽재우를 치제하다



예조 좌랑 유약을 보내어 우윤(右尹) 곽재우에게 치제(致祭)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곽재우는 참으로 이른바 부귀(富貴)로도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지 못할 장부이다. 임진왜란 초에 포의(布衣)로서 향병(鄕兵)을 끌어 모아 왜적을 섬멸해 공을 많이 세워 찰리사(察理使)의 직임에 제수되었다. 난이 평정된 뒤에 여러 차례 방백과 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뜬구름과 같이 보아 표연히 시골로 내려갔으며, 필마에 종 하나 거느리고 가야산을 두루 돌아다녔다. 돌아와서는 초가집 몇 칸을 낙동강 하류에다 얽어놓은 다음 그 집의 이름을 ‘창랑(滄浪)’이라고 하고, 스스로 호를 ‘망우(忘憂)’라고 하였다. 삿갓과 도롱이를 입고 지내면서도 즐거워하면서 세상을 잊었으나, 말이 국사에 미치면 항상 마음을 쓰며 잊지 못하였다. 사람들이 혹 그가 소나무 잎을 먹는 것을 가지고 하찮게 여겼으나, 이끗을 다투느라 칼날을 쓰다듬고 하찮은 일에 골몰하는 이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어찌 크게 다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