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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정보

큰 강을 오가는 나룻배가 머무는 나루터



나루터 마을은 큰 강을 오가는 교통로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다. 오가는 사람이나 물자가 많아지고, 이와 관련된 교통과 숙식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여 들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나루터 마을은 강이나 바다 같은 물길이 닿는 곳에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뭍길과 물길이 서로 교차하고 나룻배가 출발하고 도착하는 도선장을 중심으로 발달한다. 또한 나루터 마을은 대부분 마주보는 강의 양안에 똑같은 시설과 기능이 모여서 쌍둥이마을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옛 나루터 자리에 대개 근대식 교량이 건설되어 있다. 대부분 근대적인 육상 교통이 발달하면서 그 기능을 잃었기 때문에 쇠퇴하였다.



도선장, 가게, 창고, 주막, 객주가가 모여 있는 시장거리



나루터에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중간상인인 객주가, 창고 겸 위탁업을 겸한 여각, 대표적인 사설 숙식업인 주막이 모였다. 교통이 좋은 나루터에는 시장 기능이 활발해져서 쌀가게, 땔나무가게, 소금가게, 어물전, 포목점 등이 세워졌다. 대표적인 중간상인인 객주가는 수십 칸의 건물에 화물을 보관하는 창고, 상거래가 성사될 때까지 화주가 묵는 객방, 음식과 술을 해결하는 주점, 화물을 싣고 온 마소와 수레를 보관하는 마굿간 등을 갖추고 있었다. 본채와 부속건물들이 ㄷ자형이나 口자형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나루터마을은 근대에 들어서 육상교통이 발달하면서 쇠퇴하였다.

전문정보

물길과 뭍길이 만나는 곳에 발달한 도진취락(渡津聚落)



나루터 마을, 즉 도진취락은 큰 강을 오가는 교통로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는데 주로 도(渡), 진(津), 포(浦), 주(州), 포(浦), 파(波) 등이 붙은 지명을 가진 곳이 지난날 나루터 마을이다. 오가는 사람이나 물자가 많아지고, 이와 관련된 교통과 숙식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여 들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택리지(擇里志)>>에서 이중환(李重煥)은 우리나라에 내륙수운(內陸水運)과 나루터마을이 발달한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들이 적어서 수레가 다니기에는 불편하므로 온 나라의 장사꾼은 말에다 화물을 싣는다. 그러나 목적한 곳의 길이 멀면 노자는 많이 허비되면서 소득은 적다. 그러므로 배에다 물자를 실어 옮겨서 교역하는 것이 더 이익이 크다. 이러한 고을로 한강에는 용산, 마포, 충주가 있고, 금강에는 공주, 부여, 강경이 있으며, 영산강에는 나주, 낙동강에는 김해, 상주가 있다. 이 중 용산, 부여는 밀물 때 바닷물이 들어온다.”

예를 들어 예성강 연안의 벽란도(碧瀾渡)는 일찍이 고려시대에 경기와 황해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을 뿐만 아니라, 왕도 개성의 문호로서 중국은 물론, 아라비아 등지와의 문물교류를 담당하여 번영했던 대표적인 도진취락이었다. 그 밖에 한강변의 삼전도(三田渡), 송파(松坡), 노량진(鷺梁津), 동작진(銅雀津), 양화진(楊花津)이 있고, 금강 연안의 웅진(熊津, 곰나루), 낙동강 유역의 삼랑진(三浪津) 등이 대표적인 나루터 마을이다.

나루터 마을은 강이나 바다 같은 물길이 닿는 곳에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뭍길과 물길이 서로 교차하고 나룻배가 출발하고 도착하는 도선장(渡船場)을 중심으로 발달한다. 육상교통과 수상교통이 만나는 곳에는 굉장히 많은 사람과 물자가 통과하게 된다. 그곳을 통과하는 사람에게 먹고 머무는 시설과 물량을 유치하고 보관하는 시설이 집중되고, 그곳에 종사하는 사람도 늘어 큰 마을로 발달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나루터 마을은 대부분 마주보는 강의 양안(兩岸)에 똑같은 시설과 기능이 모여서 쌍둥이마을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남한강과 북한강 수로 변에는 각각 약 200개 및 100여 개의 마을이 있었고, 선박의 기항지(寄港地)도 약 150여 곳이 있었다. 이 가운데 갯벌장이 설 정도의 큰 포구(浦口)는 20여 개소 정도였다. 대표적인 나루터인 한강진, 송파진, 노량진 등은 경강(京江) 일대에서 가장 번창했던 세 나루터, 즉 삼진(三津)으로 꼽을 수 있다. 나루터는 강폭이 비교적 좁으면서 한강 남북의 육상교통로와 연결되는 요지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옛 나루터 자리에 대개 근대식 교량이 건설되어 있다. 근대적인 육상 교통이 발달하면서 대부분 그 기능을 잃었기 때문에 쇠퇴하였다.

이들 포구와 나루터 주변에는 창고업, 도매업, 숙식업이 성행해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중간상인인 객주가(客主家), 창고 겸 위탁업을 겸한 여각(旅閣), 대표적인 사설 숙식업인 주막(酒幕)이 바로 전국의 산물이 집결되는 한강변에 모였다. 교통이 좋은 나루터에는 시장 기능이 활발해져서 한강변에는 주로 쌀가게, 땔나무가게, 소금가게, 어물전, 포목점 등이 세워졌다. 서강과 마포의 싸전이나 용산의 시목전(柴木廛), 마포의 염전(鹽廛)처럼 독자적으로 설립된 가게도 있었으나, 본전(本廛)은 한양성 내에 있고 한강변에 있는 것은 그 분전(分廛) 같은 성격이었다.

지방산물이 서울에 올라오면 여각과 객주를 거쳐 성내의 도매상과 소매상에게 공급된다. 지방상인이 서울상인과 직접 거래하는 것이 금지되었던 시대에 그들은 여각 객주에게 들러 자기 상품의 판매와 거래자를 소개해 줄 것을 의뢰하며 거래처가 나타날 때까지 물건을 창고에 보관하고 소정의 보관료를 낸다. 여각과 객주가 시장상인 조합장에 해당하는 행수(行首)에게 이를 알리면 그는 지방상인과 협상하여 가격을 정한다. 그런 다음 행수는 합의된 가격으로 해당 상품을 구입할 것을 산하 점포에 통보한다.

객주가는 수십 칸의 건물에 화물을 보관하는 창고(倉庫), 상거래가 성사될 때까지 화주가 묵는 객방(客房), 음식과 술을 해결하는 주점(酒店) 등을 갖추고 있었다. 17세기 이후로 객주가의 기능에 창고 위탁업을 겸한 여각이 점점 발전하였다.

김준근의 풍속화 <객주>에 그려진 모습은 주막, 상점, 역원, 창고의 건축 특징을 통합한 특징을 갖고 있다. 본채와 부속건물들이 ㄷ자형이나 口자형으로 각 건물들이 연결되어 있다. 화주가 묵는 객방은 바깥쪽 대문간에 이어서 ㄱ자형으로 자리 잡고 3-4개의 방을 연결하였다. 화주들이 머물며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흥정을 하며 거래를 하는 장소로 쓰였다. 안마당의 한 곁으로 화물을 싣고 온 말과 소를 묶어둔 3-4칸의 마굿간이 있는데 객주에 따라서는 큰 규모로 짓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음식과 술을 조리하고 갖가지 편의를 제공하는 주점과 부엌이 3-4칸으로 지어졌다. 화물들을 보관하는 창고가 수십 칸씩 지어져 있었다.

상인들은 흥정이 마무리될 때까지 물건판매를 의뢰한 객주나 여각에 묵게 되는데, 이들 객주나 여각에서는 흔히 투전판이 벌어지곤 하였다. 특히 뗏목을 싣고 온 뗏꾼들은 큰 돈을 벌기도 하였는데, 투전판에 빠져 이를 탕진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이렇게 발달한 내륙 수운과 나루터마을이 왜 쇠퇴했을까? 근본 이유는 육상교통의 발달에 있다. 20세기에 들어와 나룻배는 철도와 자동차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다.

스토리가이드

주제 : 희생

인물 : 신사천(임란 때의 낭장), 신사천의 딸, 왜적, 피난민들

배경 : 나루터



줄거리

임진왜란 당시 낭장 신사천의 딸은 왜적에게 쫓겨 아버지를 따라 강나루에 도착한다. 배를 타고 건너려 할 즈음에 왜적이 몰려와 배에 탄 피난민들을 거의 다 죽였으며 그녀의 아버지도 해를 당한다. 왜적이 그녀를 배에서 끌어내자 “네가 나의 아버지를 죽였으니 불공대천의 원수이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너를 따르지 않겠다”고 외치고 왜적의 목을 잡고서 거꾸러뜨리니 왜적이 대노하여 칼로 내리쳐 죽이고 만다.



이야기 자료

<자료1>

<나루터의 구렁이>, <<한국불교전설99>>, 최정희, 우리출판사



초여름 새벽, 한 젊은이가 길떠날 차비를 하고 나섰다.

“어머님 다녀오겠습니다. 그 동안 건강에 유의하십시오.”

“내 걱정 말고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그리고 꿈자리가 뒤숭숭하니 여자를 조심해라.”

해가 떠오르니 날씨가 더웠다. 젊은이는 강가로 내려가 저고리를 벗고 얼굴을 씻었다. 기분이 상쾌하면서 시장기가 들자, 물가에 앉아 밥을 먹었다. 길 떠날 준비로 간밤에 잠을 설친 젊은이는 배가 부르자 잠이 들었다.

얼마쯤 잤을까. 젊은이는 문득 잠에서 깨어나 주위를 살폈다.

“분명 꿈을 꾸었는데, 이상하다. 전혀 기억이 안나니.”

여자를 조심하라며 신신당부하던 어머니 말씀을 떠올리면서 젊은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여자가 있었던가?’ 젊은이는 꿈속을 더듬으며 개나리 봇짐을 어깨에 메는 순간 뇌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렇지 봇짐 속을 보자.’ 젊은이는 짐을 풀다가 한 마리의 큰 구렁이가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보고서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젊은이가 큰 돌멩이를 들어 던지려고 하자 구렁이는 스르르 몸을 풀어 숲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래, 저 구렁이가 사공에게 쫓기던 여인이 틀림없어.’

젊은이는 비로소 꿈속의 일을 기억해냈다.

나루터에 도착한 한 동자승이 사공에게 배를 태워 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뭐 강을 건너게 해달라고? 꼬마 중이 돈이 어디서 나서 배를 타려고 해. 중이라고 배를 거저 탈 생각은 아예 말아라.”

“뱃삯은 있습니다. 태워 주세요.”

“어디 그럼 삯 먼저 내놔봐.”

동자승이 꺼낸 엽전 꾸러미를 본 사공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너 그 돈 어디서 난거냐?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관가에 고할 것이다.”

“이 돈은 보은사를 중창할 돈이예요. 스님께서 강 건너 대장간에 가져다주라고 하셔서 가는 길입니다.”

“그래, 그럼 건네주지. 어서 타거라.”

동자승을 태운 배가 강 가운데로 갔을 즈음 한 여인이 헐레벌떡 뛰어오며 나룻배를 불렀다.

“여보세요, 잠깐만 기다려요.”

“안돼요. 배를 띄웠으니 다음 차례를 기다리시오.”

동자승이 사공에게 여인을 태우자고 했지만, 사공은 다시 큰소리로 외쳤다.

“여기 탄 손님은 스님이라 외간 여자와는 함께 타지 않소.”

“아니 내가 언제 그랬어요. 기왕이면 함께 가는 것이 사공에게도 이롭지 않습니까. 어서 배를 기슭에 대세요.”

사공은 하는 수 없이 배를 기슭에 대고 여인을 태웠다.

“고맙습니다. 스님.”

여인은 동자승에게 인사를 하고서 물었다.

“스님은 어디로 가세요?”

“예, 절 중창에 필요한 연장을 맞추러 대장간에 가는 길입니다.”

“절을 중창하시면 시주를 거두시겠군요. 저도 시주를 하고 싶으니 저희 집에 같이 가주시지요.”

“고맙습니다. 소승은 보은사 사미승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공이 갑자기 노를 들어 여인을 후려치며 외쳤다.

“이 요사스러운 년아. 왜 하필 스님을 꼬이느냐!”

사공을 내려치는 노를 피해 물 속으로 뛰어든 여인은 금방 한 마리의 큰 암구렁이가 되어 달아났다.

그 바람에 놀란 젊은이는 잠을 깼다. 해가 서산에 기울 무렵 젊은이는 나루터에 닿았다. 늙은 사공이 빈 배에 앉아 있었다.

“노인장 나루를 건네주시겠습니까?”

“어서 타십시오. 헌데 젊은이는 이렇게 늦게 어디를 가시오.”

“과거를 보러 가는 길입니다.”

“나루를 건너면 30리 안에는 인가가 없는데 어디서 머무시려고?”

“인가가 없다니요?”

젊은이는 그제사 사공을 똑바로 보았다. 꿈속의 그 사공과 닮은 것 같았다.

“이곳이 여강나루가 아닙니까?”

“여강나루이지요. 그러나 젊은이는 새벽부터 길을 잘못 들었소. 젊은이는 오늘 낮에 강가에서 암구렁이를 보았지요. 이 길은 저승으로 통하는 길이오. 나루를 건너면 보은사가 있지만 누구도 살아서 절에 닿는 사람이 없소.”

“노인장, 저는 그럼 죽은 것입니까? 산 것입니까?”

“죽지는 않았소이다. 다만 젊은이는 효심 때문에 여기 이른 것이오. 당신 어머니는 오늘 아침 당신이 길을 떠나자 곧 숨졌소. 지금은 보은사 나찰이 됐는데 절이 낡아 거처할 곳이 없어 절 아래 동굴에 머무는데 그곳은 백사녀라는 마귀가 사는 집이라오. 그 마귀는 당신 어머님께 집을 빼앗기고 화가 나서 당신을 해치려고 했으나, 다행히 나한테 들켜 당신을 해치지 못한 것이오.”

“그러면 꿈속의 동승은 저입니까?”

“그렇소. 당신의 전생 모습이오. 당신은 전생부터 보은사를 중창하겠다는 서원을 세웠지만 아직도 실행하지 못하고 있소. 오늘 이런 기회도 모두 부처님의 계시입니다.”

젊은이는 조선 성종 4년에 장원급제하여 여주 고을 원님이 되어 대왕대비 특명으로 보은사를 크게 중창했다. 그 후 부처님 신탁으로 중창했다고 해서 신륵사라 개칭했다. 지금도 신록사 탑 밑에는 젊은이의 어머니인 나찰이 살고 있다고 한다.



<자료2>

<<조선왕조실록>> 세종 081 20/20/17(경술)



각처의 나루터에 관선(官船)이 몸체는 크지만 수효는 적습니다. 매양 겨울철 얼음이 얼기 시작하면, 나루치(津人)가 따로 가볍고 빠른 사선(私船)을 사용하여서 말 되의 곡식을 가리지 않고 뱃삯을 요구해서 받는데, 행인들이 다투어 건너느라 그 뱃삯을 두 배나 내게 되옵니다. 비록 나루터의 관장(官長), 정장(亭長)이라 하더라도 이를 금지하지 못하니, 나라의 은혜로운 정치가 백성에게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도망해 달아나는 사람들도 막을 수가 없사옵니다. 바라옵건대, 각처의 나루터에 가볍고 빠른 배를 더 설치한 후 만일 사선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는 자가 있으면, 사람들에게 고발하는 것을 허락하여 법으로 엄히 다스리소서.



<자료3>

<열전> <<삼국사기>>



도미는 백제 사람이다. 개루왕이 이를 듣고 도미를 불러 말했다.

“대개 부인의 덕이 정결하다 하나 만약 으슥한 곳에서 잘 유혹하기만 하면 마음이 변하는 경우가 많다.”그러자 도미가 아뢰었다.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사오나, 신의 아내는 죽을망정 딴 뜻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이 시험하려고 도미를 잡아두고, 신하를 시켜 왕의 의복을 입히고 말을 태워 그 집에 이르러 왕이 왔다고 전하게 했다. 그런 다음 그녀에게 말하길 “내 오랫동안 네가 예쁘다는 말을 듣고 도미와 내기를 하고 왔노라. 내일은 너를 내 후궁으로 삼아 이후 나의 소유가 되게 하겠다”고 하고서는 그녀를 범하려 했다. 그의 아내가 말하길, “왕의 말씀을 제가 어찌 어기겠습니까. 왕께서 먼저 방으로 드소서. 저는 옷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고 하고서는 여종을 자신인 것처럼 꾸며서 방안에 들게 했다.

얼마 후 속았다는 것을 안 왕은 크게 노하여 도미의 두 눈을 빼고서 배에 태워 강에 띄웠다. 그리고 그 아내를 데려오게 해 범하려 하자 도미의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이제 남편을 잃고 혼자 몸으로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더구나 대왕님을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그런데 제 지금은 몸이 더러우니 목욕을 하고 오겠습니다.”

왕은 그 말을 믿고 그러라고 했다. 도미의 아내는 밤을 틈타 도망가 강에 이르러 통곡하였다. 그때 갑자기 배 한 척이 다가 다가오자, 그것을 타고 천성도라는 섬에 가서 그 남편을 만나 고구려로 가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