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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 성황사
대관령 성황사

대관령 성황사

일반정보

강릉단오제가 열리는 대관령성황사



대관령국사서낭당, 산신당의 여러 신은 영동지방의 가뭄, 홍수, 푹풍, 질병 등을 막고 풍작, 풍어 등을 보살펴 주는 영험한 신으로 믿어오고 있다. 이 때문에 강릉에서는 400년 전부터 매년 강릉단오제가 열린다. 강릉단오제는 마을의 안녕과 개인의 소망을 비는 의식이다. 단오제가 열리는 장소가 바로 대관령성황사인데, 대관령국사서낭신인 범일국사서낭신이 모셔져 있다. 강릉단오제는 음력 3월 20일 신께 바치는 술을 담그는 날로부터 음력 5월 6일에 이르기까지 근 50 여일에 걸쳐 제의가 거행된다.



서낭신을 모신 집 성황사



대관령성황당은 성황사와 산신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황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1미터 되는 기단 위에 조성되어 있으며, 우측의 계단을 통해서 올라설 수 있다. 출입문은 정면에 쌍여닫이로 된 문이 있으며, 좌우로 살창이 설치되어 있다. 좌우벽면은 풍판 안쪽으로 조그마한 환풍구가 있을 뿐이다. 지붕은 서까래와 부연이 설치된 겹처마로 되어 있어 건물의 격을 높이고 있다. 맞배지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좌우에 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내부는 좌우로 대들보가 천정을 가로지르고 있고, 천정은 연등천장, 바닥은 우물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내부와 외부에 노란색과 붉은색의 단청이 칠해져 있다.

전문정보

강릉단오제와 대관령성황사



강릉단오제는 마을을 지켜주는 대관령산신께 제사지내고, 마을의 평화와 농사의 번영, 집안의 태평을 기원하는 축제이다. 강릉단오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동의보감>>을 지은 허준이 1603년에 강릉단오제를 구경했다는 내용으로 보아 약 400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관령성황사에 모시고 있는 서낭신의 유래는 김유신 유래담과 대관령국사서낭신인 범일국사(泛日國師 또는 梵日國師라 표기) 유래담이 있다. 또한 서낭신에 얽힌 전설로는 국사서낭신과 여국사서낭신이 부부로 된 전설이 있다.

김유신 유래담은 김유신이 명주로 유학을 와 대관령산신에게 검술을 배워 삼국을 통일하고 죽어 대관령산신이 되어 지방민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범일국사 유래담은 옛날 강릉에 한 처녀가 굴산사 앞 우물에서 바가지로 물을 긷다가, 바가지 안에 해가 떠 있는 물을 마시고 임신해 아이를 낳았다. 그 후 아비 없는 자식이라 하여 처녀는 그 아이를 뒷산 학바위 밑에 버리고 뜬눈으로 밤을 새운 뒤 이튿날 아침 그곳에 가 보니, 새들이 날아와 깃으로 덮어주고 짐승들이 젖을 먹이므로 비범한 아이임을 깨닫고 집으로 데려와 길렀다. 그 아이가 자라나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이름을 나라에 떨치고 나중에는 국사(國師)에 이르렀으며, 임진왜란 때 왜군(倭軍)을 물리치고 죽은 후 대관령의 서낭신으로 좌정했다는 설이다.

대관령국사서낭신이 여국사서낭신과 부부 인연을 맺게 된 전설은 옛날 강릉에 살던 어느 정씨(鄭氏)의 꿈에 대관령서낭님이 나타나 딸과의 혼인을 청하기에 거절하였더니, 며칠 뒤 호랑이가 나타나 딸을 물어갔다. 정씨가 대관령서낭당에 가보니 딸은 서낭님과 짝지어 벽에 서 있으며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화공을 불러 딸의 화상을 그려 서낭님 곁에 붙이자 비로소 딸의 몸이 벽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이런 혼배(魂配)가 있던 날이 음력 4월 15일이므로 이날 대관령 서낭님을 모셔와 여국사서낭당에서 합사(合祀)를 시킨다.

강릉단오제는 음력 3월 20일 신주(神酒)를 담그는 날로부터 음력 5월 6일에 이르기까지 근 50여 일에 걸쳐 제의가 거행된다. 3월 20일에 제수용(祭需用)의 술을 빚는 것으로 시작하여, 4월 1일 초단오라 하고 이날 호장(戶長), 부사색(府使色), 수노(首奴), 서낭직, 관노(官奴) 등이 서낭신에게 신주(神酒)와 떡시루를 올리고 제사를 지낸다. 4월 8일에 재단오라 하고, 4월 1일과 똑같이 거행한다. 4월 14일 저녁에 대관령국사서낭신을 봉영(奉迎)하기 위해 출발한다. 4월 15일 삼단오라 하고 이날 오전 중에 대관령국사성황당에 도착하여 성황당과 산신당에 각각 제사를 지낸다. 4월 16일에 서낭님 부부를 다시 시내에 있는 대성황사에 모시게 된다. 5월 1일에 오단오라 하고, 이날부터 본격적인 단오제가 시작된다. 화개(花蓋)를 만들고, 무당들의 굿과 가면놀이가 당집 앞에서 벌어진다.

대관령성황당은 성황사와 산신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황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1미터 되는 기단 위에 조성되어 있으며, 우측의 계단을 통해서 올라설 수 있다. 출입문은 정면에 쌍여닫이로 된 문이 있으며, 좌우로 살창이 설치되어 있다. 좌우벽면은 풍판안쪽으로 조그마한 환풍구가 있을 뿐이다. 지붕은 서까래와 부연이 설치된 겹처마로 되어 있어 건물의 격을 높이고 있다. 맞배지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좌우에 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내부는 좌우로 대들보가 천정을 가로지르고 있고, 천정은 연등천장, 바닥은 우물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내부와 외부에 노란색과 붉은색의 단청이 칠해져 있다.

스토리가이드

주제 : 희생

인물 : 정씨, 정씨의 딸, 호랑이, 성황신

배경 : 대관령성황당



줄거리

강릉에 사는 정씨에게는 과년한 딸이 있다. 하루는 꿈에 대관령성황이 나타나 이 집에 장가오겠다고 청했지만 사람이 아닌 성황을 사위 삼을 수 없다고 거절한다. 어느 날 딸이 툇마루에 앉아 있는데 호랑이가 와서 업고 가버린다. 호랑이는 바로 대관령 성황신의 사자이다. 정씨가 대관령성황당에 가보니 딸이 성황과 함께 서 있는데, 벌써 죽어 혼은 없고 몸만 비석처럼 서 있어 아무리 떼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가족들이 화공을 불러 영정을 그려 세우고 나서야 죽은 딸의 몸이 떨어진다.



이야기 자료

<자료1>

<범일국사설화> <<강릉의 뿌리>>, 강릉시, 1981



강릉에서 남서쪽 5킬로미터 떨어진 명주군 구정면 학산리에는 대관령국사성황신인 범일국사와 관련된 학바위, 석천(石泉), 굴산사(掘山寺) 터 등의 유적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옛날 학산리 마을 대갓집에 한 처녀가 있었는데, 새벽에 굴산사 앞의 샘에 가서 물을 뜨니 바가지 물속에 해가 떠 있었다. 처녀는 물을 버리고 다시 떴으나 그래도 여전히 해가 또 물 속에 있어 버리고 다시 물을 떴지만 마찬가지였다. 처녀는 이상하게 여기면서 그 물을 마셨다. 그런 후 처녀의 몸에 태기가 있어 달이 차자 옥동자를 낳았다. 처녀가 아비 없는 애를 낳았다고 해서 집안에서 몰래 그 아기를 뒷산 학바위에 버렸다. 아기를 버린 산모는 며칠을 뜬눈으로 지샌 후 모정을 못 이겨 학바위로 찾아갔다. 이미 죽었거나 산짐승이 물어간 줄 알았던 아기는 학들이 빨갛고 작은 구슬을 입에 넣어 먹여주며 날개로 따뜻하게 감싸주고 있었다. 이를 보고 그 아이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늘이 점지해 준 아이라 믿고 키우니 자라면서 점점 머리가 비범하였다. 커서는 수도인 경주로 보내 공부를 시켰다. 소년은 열심히 공부해 마침내 국사가 되었으며 그 이름을 중국에까지 떨치게 되었다. 범일국사는 고향인 학산에 돌아와 자신의 지팡이를 던져 꽂힌 곳에 절을 지어 심복사(尋福寺)라 이름했다.



<자료2>

<<조선왕조실록>> 명종 032 21/01/24(병진) / 개성부의 유생들이 사당을 소각한 것을 추고하도록 하다



중궁전승전색(中宮殿承傳色) 조연종(趙連宗)과 내수사 별좌 박평(朴評)이 내교(內敎)에 의하여 개성부(開城府) 송악산(松岳山)에 가서 조사하고 돌아와서 서계(書啓)를 올렸다.

“서낭당(城隍堂), 월정당(月井堂), 개성당(開城堂), 대국당(大國堂)은 모조리 유생들에 의해 소각되었고 국사당(國祀堂)은 지붕의 기와만 거두어 깨쳤을 뿐이며 덕적당(德積堂)은 유생들이 내관(內官)이 장차 적간한다는 말을 듣고 역시 소각시키기 위하여 이전처럼 집회하였으므로, 내관이 유수(留守)에게 고하여 금지시키려 하였으나 듣지 않고 모두 소각시켜 버렸습니다.”

이에 왕이 전교했다.

“이 단자를 보니, 극히 해괴하다. 개성부는 제릉(齊陵), 목청전(穆淸殿)이 봉안된 곳인데 근자에 나라의 기강이 없어지고 인심이 사나와져서 광패한 짓을 자행하니, 보이는 대로 엄중히 다스려 기강을 진작시키지 않으면 안 되겠다. 엊그제 내수사 노의 보고에 의하여 대비전에서 내관을 보내 적간한 바, 예로부터 내려오던 영산의 기도처가 모두 소각되었고, 사명(使命)이 내려간 때에도 사명을 돌아보지 않고 유수의 금지도 듣지 않은 채 모두를 소각시켜 버렸으니 이는 선왕과 선후(先后)가 봉안된 곳에 불경한 것이고, 또 대비전의 사명을 무시한 소행이니, 극히 포악하다. 만약 진정한 유생이라면 어찌 이처럼 패악한 일을 자행하겠는가. 금부 낭청을 파견하여 모조리 잡아다가 추고하고, 유수, 경력, 도사, 교수 등은 이를 검찰하지 못하여 이같은 변을 발생하게 하였으니 역시 잘못이다. 아울러 추고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