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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서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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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정보

건축공간으로 들어온 자연



정원이란 마당에 나무와 꽃과 풀을 심고 연못을 만들어 건축 공간 안에 자연을 들여놓은 것이다. 전통적으로 우리 민족은 산을 배경으로 집을 짓고 집 밖으로 보이는 울창한 숲과 시내, 여러 가지 꽃과 나무를 정원의 일부로 여겼다. 그래서 인간의 즐거움만을 위한 정원을 만들지 않고, 자연스러움을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해 집터의 조건과 자연적 변화에 순응하는 정원을 만들었다. 자연순응, 자연합일의 전통적 자연관에 바탕해 인위적 요소의 가미를 최소화하는 자연 그대로의 소박함을 지닌 정원이 우리 전통 정원의 특징이다.



자연에서 경치를 빌리는 차경의 미학



한국 전통 정원은 건물 밖에 존재하는 자연을 인공적으로 건물 안으로 끌어들여오지 않고도 건물 안에서 자연을 바라보고 즐길 수 있도록 처리한다. 이는 전통 건축이 자연환경과의 연계적 의미를 중시해 자연경관을 해치지 않고 오히려 건물을 통해 자연경관을 잘 살리는 방향으로 세워지기 때문이다. 전통 건축의 공간은 막히고 차단되어 그 흐름이 멈춘 죽은 공간이 아니라 내부와 내부, 내부와 외부, 외부와 외부가 서로 통하여 끊임없이 흐르고 시각적으로 살아있는 공간이다. 이처럼 한국의 전통 건축이 자연과의 융합을 지향한 입지와 건축내 부의 유기적 공간구성으로 인해 자연의 경치를 빌려 쓰는 ‘차경’이라는 경관처리 방법이 가능하게 된다.

전문정보

별서형 임천(林川) 정원(庭園), 서석지(瑞石池)



한국의 정원문화는 일본과 함께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양식으로 발전했다. 한중일 삼국의 정원 구성상의 특징을 비교해 보면, 일본은 자연을 축소해 자연을 인간의 눈 앞에다 옮겨놓고 보기 위해 꾸미고, 중국은 자연의 광대함을 강조하기 위해 화려하게 꾸민다. 반면, 한국은 자연을 조망할 수 있는 풍광이 좋은 곳에 집을 짓고 집밖에 펼쳐진 자연 그대로를 정원으로 삼을 수 있도록 했다. 흔히 한국예술의 특징은 인위적인 꾸밈을 배제하고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무기교의 기교 혹은 소박미에 있다고 한다. 이러한 심미의식은 정원의 조영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인간의 손에 의한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방법이 아닌 자연상태 그대로를 잘 유지하면서 자연에 동화되도록 꾸며진 우리의 전통 정원에는 자연순응(自然順應)의 자연관이 관철되어 있다.

한국 전통정원의 특징은 사상적으로 신선사상이 그 기본적 배경을 이루고 있어, 직선적인 윤곽선 처리 기법과 원지(園池)의 형태 및 구성이 매우 단조롭다 또 유교적인 사회풍토로 인해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생활철학을 따르려는 선비들이 수심양성(修心養性)의 장(場) 또는 풍류생활(風流生活)의 장(場)으로서 정원을 조성하였다. 그들은 정원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이 자연에 동화되기를 추구했다.

조선시대에는 사화와 당쟁으로 유학자들이 대거 낙향해 은거하였다. 그들이 자연 속에서 소요하고 강학하는 기풍이 성행하면서 별서형의 임천(林川) 정원이 등장하였다. 이들 별서형 임천 정원의 조영상 특징은 주위의 자연경관이 주(主)가 되고 정자와 못 등 인공 조영물은 종(從)의 위치에서 자연에 의존하는 형식으로 자연과 동화되는 자연순응에 있다. 그 전형적인 사례를 서석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석지는 17세기 정영방(鄭榮邦)이 조성한 별서정원이다. 정영방은 유년에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성균관 진사시험 급제를 끝으로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자연경관을 시문으로 표현한 당대의 뛰어난 문인이었다. 정영방의 자연관은 자연의 힘을 바탕으로 하여 참된 도를 이루고 자연과 더불어 삶을 영위하는 것으로서 동양의 전통적인 자연관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자연관은 서석지의 입지와 조영 및 건물배치 등 모든 분야에 반영되어 있다.

서석지가 자리잡은 연당동은 일월산에서 뻗어 내린 대박산 줄기의 자양산록에 전개되는 분지이다. 남으로는 진보, 북으로는 영양에 이르며, 안동, 봉화, 영덕지방의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연당동은 높이 10여 척에 달하는 쌍벽의 석문을 지나 청기천(靑杞川)을 따라 서북쪽으로 진입하면 나타나는데, 총 넓이는 45만여 평에 이른다. 청기천은 마을 입구를 흐르는 계곡으로 수량이 풍부하고 주변 경관이 수려해 자연과 벗하며 즐기기에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서석지의 공간구성은 주생활 공간인 내원과 가시권 내의 자연경관 및 전원공간을 포함하는 외원(外園) 그리고 외원을 둘러싼 영향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원은 독서, 사교, 산책, 양어, 영농관리 등의 기능을 담당하는 공간이며, 외원은 산책, 낚시, 영농 및 차경원(借景源)으로서의 다목적 기능을 갖는 권역으로 내원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 밖의 영향권은 환경 및 자원보존과 조망원으로서의 기능뿐 아니라 석문 임천 정원으로 들어서는 진입로변의 수경적(水鏡的) 기능도 함께 하고 있다.

서석지는 동서 약 26미터, 남북 약 21미터의 네모꼴 평지에, 남북 12미터, 동서 13미터의 방형 연못을 중심으로 해서 북쪽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주일재(主一齋)가 세워져 있다. 서쪽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경정(敬亭)이 자리 잡고 있다. 주일재는 주인이 거처하는 곳으로 서남쪽을 향하고 있고, 경정은 강론과 휴식을 위한 정자 건물로 동남쪽을 향하고 있다.

못 바닥에는 수많은 갈래로 분리된 석영맥(石英脈)이 발달되어 있어서, 햇빛에 굴절되어 물위로 떠오르면 마치 아름다운 보석처럼 보인다. 서석지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서석지 내에는 현재 99개의 서석이 있으며, 그중 61개의 서석이 물 위에 떠 있고 그 중 90% 이상이 동안변에 분포되어 있다.

주일재 앞쪽에는 동서 4.5미터, 남북 3미터의 네모난 단을 못 안쪽으로 돌출되게 축조하여 소나무, 매화나무, 대나무, 국화를 심고 사우단(四友壇)이라 이름 붙였다. 이와 더불어 못 안에는 연꽃을 심었는데, 서석지에는 선비들이 인격도야(人格陶冶)의 지표로 삼았던 식물들이 모두 갖추어졌다. 사우단에 심어진 식물들은 주일재에서 바라볼 수 있고, 서석지의 경관은 경정에서 감상할 수 있다.

서석지는 원(園)의 사방이 담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마당에는 여백이 없을 정도로 못이 조영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정원 시설물의 배치는 동서를 축으로 해서 서북에 경정을 세우고 서석지를 대경이 되게 배치했으며, 좌우를 축으로 주일재와 정문이 남북으로 대칭이 되게 배치했다.

연못은 중도(中島)가 없는 방지(方池)의 형식에 동서의 길이가 남북의 길이보다 약간 긴 형태이다. 이는 경정에서 대경으로 바라다 보이는 동안변의 서석군을 자연스럽게 바라보려는 배려이며, 더불어 임천 외원의 동쪽에 있는 아름다운 경관을 차경하기 위한 목적에서 안배된 것이다.

스토리가이드

주제 : 수수께끼

인물 : 풍산 마을 배감사, 도깨비들

배경 : 풍산 근처 낙동강변



줄거리

풍류를 좋아하는 풍산 고을의 배 감사가 강둑을 산책하다가 잠들자, 이를 죽은 것으로 생각한 도깨비들이 장사지내 주려 했다. 그를 메고 절벽을 오르던 중 한 도깨비가 그곳에 묻자고 하자 다른 도깨비들은 그곳은 정자터이지 묘터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이를 들은 배감사가 죽을 힘을 다해 고함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자 도깨비들이 놀라 달아나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큰 바위가 굴러 떨어져 정자 짓기에 알맞은 터가 생겼다.



이야기 자료

<자료1>

<<경정잡영>> <주일재>



학문을 함에 몸으로 공경히 실천하고 명예를 가까이 하지 않도다.

내 몸이 쇠하여 자득함이 없지만 네가 책 읽는 소리를 듣도다.



<자료 2>

<<조선왕조실록>> 010 02/11/11(임진) / 김창업이 사사로이 개간하여 소유한 열무장을 도로 진폐시키도록 하다.



김창집(金昌集)의 아우 김창업(金昌業)은 집안이 본시 부요(富饒)한데다가, 또 김창집의 세도(勢道)를 빙자하여 별서(別墅)를 동교(東郊)의 밖에 크게 지었고, 10리나 되는 금경지를 개간하여 천백(阡陌)을 연긍(連亘)하였으며, 백 년 동안 양송(養松)한 산을 점거하여 원림(園林)을 장점(粧點)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오히려 부족하여 전리(箭里)의 열무(閱武)하는 장소를 차지하려고 그의 형을 종용하여 드디어 공지(空地)를 백성에게 허여한다는 뜻을 연중(筵中)에서 진백(陳白)하고는 비옥한 토지를 죄다 그의 소유로 만들었다. 김창집이 패망하자, 대관(臺官)이 논계(論啓)하여 도로 진폐(陳廢)하는 일을 청하니, 경조(京兆)에 내렸는데, 이에 이르러 한성부에서 낭관(郞官)을 보내어 적간(摘奸)한 뒤에 아뢰었다.

“열무장(閱武場) 안과 장대(將臺) 아래에 김창업이 둑을 쌓고 기경(起耕)한 곳이 많이 있는데, 절반은 수해로 진폐(陳廢)되었고, 절반은 이제 바야흐로 기경(起耕)하고 있었습니다. 불천(佛川)의 하류(下流)에는 전부터 솔밭이 있었는데, 소나무가 해충으로 손상되었다고 핑계대어 또한 기간(起墾)하였으며, 청량산의 한 동학(洞壑)도 여러 해 동안 소나무의 벌목을 금지한 곳인데 제멋대로 개간하여 만든 전지가 면적이 매우 넓고 크다 합니다. 군병(軍兵)이 열무(閱武)하는 장소와 금표(禁標)하여 양송(養松)하는 땅이 이 어찌 사가(私家)의 경작하는 곳이 되겠습니까? 김창업이 법령을 무릅쓰고 기경(起耕)하여 멋대로 자기 물건을 만든 것이 진실로 대계(臺啓) 가운데 논핵(論劾)한 것과 같으니, 일이 지극히 놀랄 만합니다. 마땅히 그 죄가 있어야 하는데, 김창업이 죽어서 이제 논할 수는 없으나, 그가 둑을 쌓고 함부로 기경한 등처를 청컨대 한결같이 모두 도로 진폐시키게 하소서. 그리고 내년 봄을 기다려 소나무를 심고 도벌을 금지하여 양목(養木)하는 일을 해도(該道)의 감역(監役)에게 엄중히 신칙(申飭)하소서.”

이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자료3>

<<조선왕조실록>> 정조 042 19/03/10(신유) / 내원에서 꽃구경을 하고 낚시질을 하다



내원에서 꽃구경을 하고 낚시질을 하였다. 여러 각신(閣臣)의 아들, 조카, 형제들도 참여하였는데 모두 54인이었다. 또 특별히 영의정 홍낙성(洪樂性)과 직부(直赴) 이시원(李始源)을 불렀는데, 영상은 연치(年齒)나 덕망(德望)에 있어 모두 높기 때문에 매년 이 모임에 번번이 불러들여 참여시켰으며, 시원은 인망을 쌓아 규장각의 관리로 뽑혔기 때문이었다. 왕이 말했다.

“올해야말로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경사스러운 해이다. 그러니 이런 기쁜 경사를 빛내고 기념하는 일을 나의 심정상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매년 꽃구경하고 낚시질하는 놀이에 초청된 각신의 자질(子姪)이 아들이나 아우나 조카에만 한정되다가 올해에 들어와 재종(再從)과 삼종(三從)으로까지 그 대상이 확대된 것 역시 대체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려는 뜻에서이다.”

조금 있다가 왕이 말을 타고 나가면서 신하들에게 말을 타고 따라 오도록 허락하였다. 어수당(魚水堂) 앞에 이르러 신하들에게 말에서 내리라고 명하였다. 천향각(天香閣)에 어좌(御座)를 설치하였다. 대신과 각신에게 술병과 안주 그릇을 하사하면서 각자 마음대로 경치 좋은 곳에서 놀며 쉬게 하였다 (중략)

술이 몇 순배 돌자 상이 세심대의 대자(臺字) 운(韻)을 써서 입으로 칠언(七言)의 소시(小詩) 한 수를 지어 읊은 다음 대신과 제신에게 화답하라고 명하였다. 또 부용정(芙蓉亭)의 작은 누각으로 거둥하여 태액지(太液池)에 가서 낚싯대를 드리웠다. 여러 신하들도 못가에 빙 둘러서서 낚싯대를 던졌는데, 붉은색 옷을 입은 사람들은 남쪽에서 하고 초록색 옷을 입은 사람들은 동쪽에서 하고 유생들은 북쪽에서 하였다. 왕이 낚시로 물고기 네 마리를 낚았으며 신하들과 유생들은 낚은 사람도 있고 낚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한 마리를 낚아 올릴 때마다 음악을 한 곡씩 연주하였는데, 다 끝나고 나서는 다시 못 속에 놓아 주었다. 밤이 되어서야 자리를 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