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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석조건축물

통신시설
방형 봉수대
방형봉수대(부산 황령산봉수대) 가상복원_0 돋보기
방형 봉수대

방형 봉수대

일반정보

5개 연기구멍으로 소식을 전하는 통신시설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을 말하며,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방위수단의 하나인 봉수제도는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어 왔으나 이 제도가 시작된 것은 퍽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봉수제도는 변경에서 급보하는 5개 주용 봉수가 있어 그 기점을 보면 동북의 경흥, 서북의 강계, 의주, 서남의 순천, 동남의 동래인데 모두 서울 남산인 목멱산에 연결되어 병조로 보고되었다. 위에서 말한 주봉 이외에도 간봉망이 있어 주봉에 연계되었다.



굴뚝이 네모나고 최전선에 설치하는 방형 봉수대



연조가 네모난 방형의 봉수대를 연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선시대 세종 때에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최전선에 설치한 봉수대이다. 대는 사각형으로 쌓아 올렸는데 높이는 30척, 밑변 길이는 20척이며, 그 둘레 바깥에 깊이 10척, 너비 10척의 해자를 빙 둘러파고 또 그 바깥에 깊이 3척의 말뚝을 여러 겹으로 둘러 박고 끝은 뾰족하게 하였다. 그 대 위에는 임시거처를 짓고 무기와 생활용구를 준비하고 봉화군 5인, 화포군 2인, 망군 2인, 감고 1인이 10일씩 교대로 근무하였다. 적이 나타나면 연기와 횃불로 다른 연대에 알리고 신포를 쏘아 주민에게 재빨리 알렸으며 적이 침입하면 화포와 궁노를 쏘아 적을 막았다.

전문정보

연기 굴뚝이 네모난 방형 봉수대(烽燧臺)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을 말하며,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방위수단의 하나인 봉수제도는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어 왔으나 이 제도가 시작된 것은 퍽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에 와서는 의종 3년(1149)에 서북병마사 조진약(曺晋若)의 건의로 채택된 바 있어 조선에 이르러서도 그대로 답습하여 왔다.

봉수의 방법은 사태의 완급을 5거제로 구분하여 급보하는데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알렸다. 평시에는 1홰(炬), 적이 모습을 나타내면 2홰,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홰, 적이 경계를 침범하면 4홰, 싸움이 벌어지면 5홰를 반복하여 변경에서 중앙까지 알리고 비바람 등으로 봉수가 불가능할 때는 봉수군에 의하여 도보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봉수제도는 변경에서 급보하는 5개 주용 봉수가 있어 그 기점을 보면 동북의 경흥(慶興), 서북의 강계(江界), 의주(義州), 서남의 순천(順天), 동남의 동래(東萊)인데 모두 서울 남산인 목멱산(木覓山)에 연결되어 병조로 보고되었다. 이 주봉(主峰) 가운데 동남의 동래 다대포진(多大浦鎭)을 초기(初起)로 하는 것은 구봉(龜蜂, 多大浦), 황령산(黃嶺山, 釜山鎭), 계명산(鷄鳴山, 東萊), 위산(渭山), 부로산(夫老山, 三南), 소산(所山, 斗西), 고위산(高位山, 慶州郡)을 거쳐 안동(安東), 충주(忠州)를 지나 남산에 연계되었다. 울산지방은 삼남면의 작천정(酌川亭) 북쪽 봉화산이 바로 부로(夫老) 봉수대가 있던 산이며 또 두서면의 구량리와 서하리 사이에 있는 봉화산이 소산(所山) 봉수대이다.

위에서 말한 주봉 이외에도 간봉망(間烽網)이 있어 주봉에 연계되었다.

연조가 네모난 방형의 봉수대를 연대(煙臺)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선시대 세종 때에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최전선에 설치한 봉수대이다. 대는 사각형으로 쌓아 올렸는데 높이는 30척, 밑변 길이는 20척이며, 그 둘레 바깥에 깊이 10척, 너비 10척의 해자(垓字)를 빙 둘러파고 또 그 바깥에 깊이 3척의 말뚝(木弋)을 여러 겹으로 둘러박고 끝은 뽀족하게 하였다. 그 대 위에는 임시거처를 짓고 무기와 생활용구를 준비하고 봉화군(烽火軍) 5인, 화포군(火砲軍) 2인, 망군(望軍) 2인, 감고(監考) 1인이 10일씩 교대로 근무하였다.

적이 나타나면 연기와 횃불로 다른 연대에 알리고 신포(信砲)를 쏘아 인근 주민에게 재빨리 신호하여 알렸으며 적이 침입하면 화포와 궁노(弓弩)를 쏘아 적을 방어하였다.

비교대상

황령산봉수대



황령산봉수대는 부산시 진구 양정동 황령산 정상에 위치한다. 고려시대부터 이용하여 온 중요한 통신시설로 세종 7년에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종 35년(1898)까지 사용하였다. 이 곳에서는 서쪽으로 구봉 봉수대, 동으로 간비오산 봉수대, 북쪽으로 계명봉 봉수대에 각각 연락하던 부산 봉수망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던 봉수대에 해당된다. 현재 황령산 산정에는 봉수대가 복원되어 있다. 수원성봉수대와 비슷하게 벽돌모양의 화강석으로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오거의 기준에 따라 부산지방에서는 유일하게 가기 불을 피울 수 있는 둥근 연조와 연기를 올릴 수 있는 연통시설을 각각 5개씩 축조하여 두었다.



예천비룡산봉수대



예천비룡산봉수대는 경북 예천군 용궁면 회룡포에 위치한다. 회룡포는 물이 360도 휘돌아 들어왔다 나가는 지형에 위치한 마을인데, 이 마을을 감상하기 위해 비룡산에는 회룡포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제1전망소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인 비룡산 정상에는 사방이 3.7미터, 높이가 2.7미터인 정방형의 봉수대가 복원되어 있다. 이 봉수는 평면은 정방형이고, 사방의 정후좌우면은 2중의 마름모 형태이다. 첫 번째 단 정면에는 불을 피울 수 있는 화구가 마련되어 있고, 2단 위쪽에는 연기가 나오는 구멍이 있는 구조이다. 비룡산봉수대는 동쪽으로 예천읍의 서암산, 서쪽으로 소이산, 그리고 북쪽의 산양면 가불산 봉수와 연락을 하였다고 한다.



설흘산봉수대



설흘산봉수대는 경남 남해군 남면 홍현리 설흘산(490미터)산정에 위치하고 있다. 남해의 봉수는 제2거선에 속했지만, 순천 돌산봉수가 가까이 있어 제5거선과도 통신이 가능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남해현읍지>>에 "현의 남쪽 30리에 있고 동쪽으로 금산 봉수에 응하고 서쪽으로 전라도 순천 돌산도 봉수에 응하는데 서로간의 거리는 60리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자연 암반을 기단으로 방형으로 축조되었으며, 중앙에 지름 2미터 정도로 파인 곳은 봉수를 하였던 곳이다. 석축으로 쌓았고 둘레는 25미터, 높이 6미터, 폭 7미터의 망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