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한국국학진흥원

석조구조물

종교시설
마애불
옥산사마애약사여래좌상 가상복원_0 돋보기
마애불

마애불

일반정보

백성들의 삶터를 굽어본 신앙물



마애불이란 바위를 파거나 새겨서 만든 불상으로 옛사람의 삶터 가까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마애불은 7세기경 백제에서 만든 서산마애석불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 바위에 광대뼈가 살짝 보이는 둥글넓적한 얼굴과 해맑은 미소는 시골의 순진한 소년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신라시대에는 석굴암을 비롯해서 조각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마애불이 경주 주변에 많이 조성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마애불은 거대한 미륵불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유교가 국시가 된 조선시대에 오면 마애불의 조성은 급격히 줄어든다. 반면 민불이나 미륵으로 불리던 선돌, 장승, 남근석이나 여근석 등 기복적인 대상물이 마애불의 자리를 대신하였다.



바위 생긴 그대로, 거친 그대로 만들어낸 돌부처



마애불은 ‘마애석불’이나 ‘마암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 마애불의 재료는 무엇보다 제작하는 방법은 도드라지게 표현하는 양각과 부조, 파내서 표현하는 음각, 선으로 가늘게 표현하는 선각 등으로 다양하다. 형태로는 앉아 있는 모습의 좌상, 서 있는 모습의 입상, 앉아 있는 모습의 의상, 협시보살이 좌우에 서 있는 삼존상 등이 많이 남아 있다. 우리 마애불의 변함없는 특징은 바위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변형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거친 것은 그대로 미숙하게 표현하여 친근하고 자애로운 모습을 만들었다. 현재 전국에는 지방문화재와 비지정문화재를 합쳐서 200여 종의 마애석불이 전국적으로 남아 있다.

전문정보

화강암(花崗巖)에 얕게 새긴 돌부처, 마애불(磨崖佛)



마애불은 ‘마애석불(磨崖石佛)’이나 ‘마암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커다란 암벽이나 구릉에 얕게 새긴 불상이다. 본래 인도에서 비롯되어 중국, 일본 등에 널리 퍼져 있으며 수법도 도드라지게 표현하는 양각(陽刻)과 부조(浮彫), 파내서 표현하는 음각(陰刻), 선으로 가늘게 표현하는 선각(線刻) 등 매우 다양하다.

우리나라는 7세기경 백제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1958년에 발견된 충남 서산시 용현리(龍賢里)의 서산마애석불(瑞山磨崖石佛)과 태안(泰安)의 마애석불은 백제시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서산마애석불은 6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세워진 위치나 바위의 형태, 불상의 방향 등에서 한국 마애불의 원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광대뼈가 살짝 드러난 둥글넓적한 얼굴과 해맑은 미소는 시골의 순진한 소년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간결한 조각수법으로 자연스레 살려낸 부드럽고 온화한 백제 특유의 미의식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신라시대에는 조각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마애불이 경주 주변에 많이 조성되었다. 석굴암(石窟庵), 경주 남산의 칠불암마애석불좌상(七佛庵磨崖三尊佛坐像)과 신선암마애보살반가상(神仙巖磨崖菩薩半跏像), 용장사지마애불좌상(茸長寺址磨崖佛坐像), 굴불사지사면석불(掘佛寺址四面石佛) 등 신라 불교문화의 전성기 면모를 한껏 자랑하고 있다. 그밖에 경북 월성군 건천읍(乾川邑)의 단석산신선사마애석불군상(斷石山神仙寺磨崖石佛群像) 등이 있다. 경북 봉화 북지리마애여래좌상(奉化北枝里磨崖如來坐像) 등이 있으며, 경남 함안군 군북면(郡北面)의 방어산마애삼존상(防禦山磨崖三尊像), 경남 합천군 가야면(伽倻面)의 치인리마애불입상(緇仁里磨崖佛立像) 등이 남아 있다. 신라 후기에는 전망 좋은 산 정상에 자리 잡은 마애불들이 많아진다. 하늘 가까운 높은 자리에 모시기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백성의 삶터를 바라보도록 배려한 기복(祈福)신앙의 측면이 엿보인다. 이는 당시에 유행했던 미륵(彌勒)신앙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마애불이 미륵불 개념으로 정착된 것은 고려시대이다. 이 시기에는 신라 후기의 마애불 조성형식을 이어받아 다채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지방 호족세력의 성장에 힘입어 지방 곳곳에 마애불이 조성됨으로써 마애불의 전성기를 이룬다. 고려 마애불의 백미는 그 거대한 크기에 있다. 파주 용미리석불입상(龍尾里石佛立像)은 불상 높이가 17.7미터이며, 내금강 묘길상 마애불은 좌상(坐像)이면서도 높이가 15미터이다. 이러한 초현세적인 듯한 거대 불상의 등장은 미륵부처의 키가 160척이나 된다는 <<불설관불삼매해경(佛說觀佛三昧海經)>>의 내용에 따른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신라시대의 마애불과 달리 탄력 있는 양감이나 정제된 세부조각의 아름다움에 소홀하였다. 이 시기에 조성된 마애불은 바위 자체가 지닌 신이성(神異性)을 강조한 듯하다.

국가의 정치이념이 유교 성리학으로 바뀐 조선시대에 오면 마애불 조성은 급격히 줄어든다. 마을공동체의 민속신앙이 융성해져 민불(民佛)이나 미륵으로 불리던 선돌, 장승, 남근석(男根石)이나 여근석(女根石) 등이 기복적인 마애불의 자리를 대신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애불은 불교신앙의 대상만은 아니다. 한국인의 고유한 신앙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부처가 새겨진 바위들은 하나같이 평범한 바위가 아니었다. 거북 형태나 남녀 성석(性石)과 함께 자리해 있어서, 산악(山嶽)의 정령(精靈)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특별한 바위에 이름을 쓰거나 치성을 드리던 무속(巫俗)신앙과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애불과 관련된 신화와 전설에는 무속과 불교신앙이 섞여 있음을 보여준다. 때로는 도교(道敎)의 신선(神仙)사상과 복합된 양상을 보이기도 하고, 암각화(岩刻畵)나 거석(巨石)문화를 통해서도 마애불이 우리나라에 어떤 모습으로 새로 태어났는지를 알 수 있다. 성리학이 국시(國是)가 된 조선시대에도 마애불은 마을 밖 산기슭에서 백성들의 삶의 일부분이 되어 아낌을 받았다.

우리 마애불의 변함없는 특징은 마애불을 새긴 암벽이나 바위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변형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자연과 조화를 우선시했던 백성들이 거친 것은 그대로 미숙하게 표현하여 친근하고 자애롭게 우리 곁에 서있다. 옛 마을을 굽어보면서 조선의 산과 들과 내를 지켜온 친근한 대상이었다. 현재 전국에는 지방문화재와 비지정문화재를 합쳐서 200여 종의 마애석불이 전국적으로 남아 있다.

비교대상

옥산사마애약사여래좌상



옥산사마애약사여래좌상은 시도유형문화재 18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경북 안동시 북후면 장기리 산 146번지에 위치한다.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화강암 자연암벽에 돋을새김을 한 마애불상이다. 이중으로 된 연화대좌에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의 법의를 갖추고 있는 여래좌상이다. 머리부분은 평면적으로 묘사하였지만, 얼굴과의 구분선이 명확하다. 얼굴은 미소를 띤 자비스런 상이며,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 위에 올리고, 법의 속에서 굽혀올린 왼손은 아랫배 부분에서 작은 약합을 받쳐들고 있다. 총높이는 약 2미터고, 불신 높이는 1.3미터다.



영주신암리마애삼존불



영주신암리마애삼존불은 보물 68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경북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1127-6번지에 위치한다.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 이 불상의 재료는 화강석이다. 본존불 높이 1.38미터, 양 협시불 높이는 오른쪽이 1.23미터, 왼쪽이 1.22미터다. 논 가운데 튀어나온 자연암석 4면에 새겨져 있다. 남면의 것은 3존상, 북면에는 미완성 작품이며, 서면은 연판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불상이 희미하게 남아 있고, 동면은 머리 부분과 몸통부분만 남아 있다. 본존의 머리는 소발에 비교적 큰 육계를 얹었으며 긴 얼굴에 미소를 띄고 있다. 통견의 법의로 두 손을 걸치고 무릎을 덮었으며, 가슴에 띠매듭이 보인다.



어물동마애여래좌상



어물동마애여래좌상은 시도유형문화재 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울산 북구 어물동 산 122번지에 위치한다. 이 마애불은 방바위라 불리는 거대한 바위에 일광, 월광보살과 약사삼존불)을 높게 돋을새김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가운데의 본존인 약사여래는 높이 5.2미터, 어깨폭 2.9미터의 큰 좌상으로, 비교적 길게 생긴 느낌을 주는 얼굴인데 이목구비가 약간 마멸되었을 뿐 세련된 모습을 보여준다. 당당한 어깨에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강건한 신체는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할 만한 조각 수법을 보여준다. 그러나 오른쪽 소매의 옷주름과 마멸이 심한 두 손등은 다소 딱딱해진 면도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