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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_농암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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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_농암신도비

경북문화재자료 64호, 안동시 예안면 위치. 농암 이현보를 기리는 신도비

일반정보

조선시대의 문인 이현보의 신도비



시조 작가 농암 이현보는 조선 중기 문신이며 본관은 영천이고, 호는 농암이고, 시호는 효절이다. 10장으로 전해지던 어부사를 5장으로 고쳐 지은 것이 <<청구영언>>에 전하며, 예안의 분강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농암집>>이 있다. 국문시가의 대가로서 처사문학을 개척하였으나 퇴계 이황과 나이 차이를 넘어선 우정을 쌓았다. 예안면 상계리를 지나 신남리(정자골)에 위치하고 있으며 토석담장을 둘러 싸여져 있다. 비각 앞에 자운재사가 위치하고 있으며 선생의 묘소는 신도비 뒷산(청량산 줄기) 중턱에 있다.



거북 등 위에 세워진 명신의 신도비



농암신도비 비각 안 비의 재질은 대리석으로, 용모양 머릿돌인 이수 없이 거북 모양의 받침돌인 귀부 위에 비신만 세웠으며, 비신의 높이는 1.9미터, 너비는 0.84미터다. 비신의 머리는 반원형으로 다듬어져 있다. 묘소는 신도비 뒷산 중턱에 있으며, 신도비 아래 자운재사가 있어 이현보의 묘소를 지키고 있다.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3량 굴도리로 되어 있으나 지붕기와가 퇴락하고 물이 새어 연목 등 목부재가 심하게 부식되어 있고 조잡하게 설치된 기단이 이완되어 흐트러져 있다. 맞배지붕에 흙으로 만든 중담, 협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문정보

농암 이현보의 신도비(神道碑)



시조 작가 농암 이현보(李賢輔, 1467-1555)는 조선 중기 문신이며 본관은 영천(永川)이고, 호는 농암(聾巖)과 설빈옹(雪翁)이고, 시호는 효절(孝節)이다. 세조 13(1477) 인제 현감이며 참찬인 이흠(李欽)의 아들로 태어났다. 연산군 4년(1498)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교서관의 벼슬과 검열(檢閱)을 거쳐 1504년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서연관(書筵官)의 비행을 공박하여 안동으로 귀양갔다. 1506년 중종반정 후 지평(持平)에 복직, 밀양과 안동의 부사, 충주목사를 지냈다. 중종 18년(1523) 성주목사 때 선정(善政)을 베풀어 왕으로부터 표리(表裏)를 하사받았고 병조참지, 동부승지, 부제학,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1542년 호조참판에 이르러 은퇴를 청했으나 윤허가 내리지 않자 온천욕을 핑계로 낙향하였다. 그래도 이듬해 상호군이 되고 자헌대부에 올랐다. 1554년 중추부지사가 되었다. 10장으로 전해지던 어부사(漁父詞)를 5장으로 고쳐 지은 것이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전하며, 예안(禮安)의 분강서원(汾江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농암집>>이 있다.

예안면 상계리를 지나 신남리(정자골)에 위치하고 있으며 토석담장이 둘러싸여져 있다. 비각 앞에 자운재사가 위치하고 있으며 선생의 묘소는 신도비 뒷산(청량산 줄기) 중턱에 있다.

조선시대 명종 20년(1566) 2월에 세웠다. 비각 안 비의 재질은 대리석으로, 이수(용의 형체를 새겨 장식한 비석의 머릿돌) 없이 귀부(거북 모양의 빗돌받침) 위에 비신만 세웠으며, 비신의 높이는 1.9미터, 너비는 0.84미터다. 비신의 머리는 반원형으로 다듬어져 있다. 묘소는 신도비 뒷산 중턱에 있으며, 신도비 아래 자운재사가 있어 이현보의 묘소를 지키고 있다.

비문의 글은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인재(認齋) 홍섬(洪暹, 1504-85)이 지었고, 글씨는 당대의 명필로 조맹부체(趙孟頫體)의 대가인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 1516-84)이 썼다. 앞면에는 ‘지중추부사증시효절이공신도비명(知中樞府事贈諡孝節李公神道碑銘)’이란 제액(題額)이 있고 한 줄에 83자씩 30줄의 비문이다. 글자 한 자의 크기는 2센티미터 가량이다.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3량 굴도리로 되어 있으나 지붕기와가 퇴락되고 누수되어 연목 등 목부재가 심하게 부식되어 있고 조잡하게 설치된 기단이 이완되어 흐트러져 있다. 맞배지붕에 흙으로 만든 중담, 협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스토리가이드

주제 : 발견

인물 : 정조대왕, 조정신하 1-2

배경 : 경복궁 인정전



줄거리

문화의 꽃이 피어난 정조시대 유명 관리들이 모여 농암의 문장에 대해 칭찬하며 농암을 기리기 위해 신도비를 세울 것을 의논한다.



이야기 자료

<자료1>

<<조선왕조실록>> 정조 043 19/11/07(갑인) / 진하 정사 이병모 등을 소견하고, 문체와 관련하여 우리나라 시문에 대해 논평하다



삼연의 시를 누가 아끼지 않겠는가 마는, 다만 그토록 화려하고 번성한 대가문에서 이처럼 산야의 싸늘하고 파리한 어휘가 나오게 된 것이 어찌 우연이라고만 하겠는가. 또 농암 이현보의 문장을 그 누가 칭송하지 않겠는가. 나 역시 매우 좋아한다. 그러나 자신은 늘 명나라 사람들의 어투를 피하려 힘쓴다고 했으나 가끔 그런 병통을 면하지 못한 곳이 나오곤 한다. 이런 경우를 두고 문장도 때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한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자료2>

<<농암집>> <화산양로연>



기묘년 가을, 관아에서 양로연을 베풀어 부내 80세 이상 노인을 찾아 사족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불문하고 나이만 되면 다 오게 하니 수백 명이 되었다. 나의 양친이 인접한 예안현에 계시는데 연세가 지금 80이다. 맹자 말씀에 “내 부모를 받들어 모시듯 다른 사람의 부모를 받들어 모시라”고 했으니, 이 좋은 시절 자리를 펴고 노인들을 모셔 즐겁게 해 드리는 데 내 부모 또한 모시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내외청에 자리를 마련하고 어버이를 중심으로 풍성한 음식을 대접하니, 보는 사람들도 칭찬하고 나도 자랑스럽다. 대개 관리나 장수, 재상이 되어 열정(列鼎)의 규모로 어버이를 받들어 섬기는 사람들이 없지 않지만, 고을 원의 신분으로 어버이와 마을의 노인들을 함께 초청하여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자료3>

<<농암집>> <화산양로연>



풍년 9월 하늘 아래

노인들을 청내로 모셨네.

서리서리 백발들이 손잡은 주변에

단풍, 국화가 가득하네.

나누어 수작하는 자리,

내 외청에 음악이 이어지네.

색동옷 입고 술잔 앞에 춤추는 사람 괴이하다 하지 마라

태수 양친이 또한 자리에 계심이다.

태수 양친이 또한 자리에 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