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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안동도호부_강가형

관련시설
종가_임청각 정침
종가_임청각 정침

보물 182호, 군자정의 본채. 고성 이씨의 종가로 본래 99칸이었지만 일제의 철로건설로 50여칸만 남아 있음

일반정보

일제에 의해 훼손된 안동의 99칸 대가집



임청각 정침은 안동시내에서 안동댐 방면으로 조금 들어가다 길 왼편에 동서로 길게 늘어져 있다. 임청각의 대지는 남북으로 짧고, 동서로 길고, 남쪽은 낮고 북쪽은 높은 경사지고 동쪽이 서쪽보다 약간 높다. 조선시대에는 낙동강변까지 임청각이었다고 하니 현재보다 많이 넓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임청각의 대지 내에서는 가장 서쪽에 정침이 있고, 중간에는 군자정이 있고, 가장 동쪽에는 사당이 있다. 임청각 정침에서는 한말의병장이자 만주 독립운동을 이끌던 이상룡이 태어났다.



용자형 배치와 신분에 따라 배열된 영역



정침 영역은 마당 영역과 군자정 영역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 정침은 용(用)자형의 배치를 가지며 남향을 하고 있다. 마당을 중심으로 나누어 질 수 있는데 동쪽 상단은 사랑마루 등을 중심으로 하는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에서 서쪽의 대문으로 들어가면 안채마당이 있다. 안채마당의 북쪽에는 대청과 안방 등이 있으며 안채마당의 서쪽에는 다시 안행랑마당이 있다. 안행랑마당의 구역을 안행랑채라고 한다. 또한 안행랑채의 남쪽 아랫단에는 바깥행랑마당이 있고 바깥행랑채가 있고, 그 옆으로 마당을 달리하는 바깥행랑채가 연이어 있다.

전문정보

안동의 종가집 임청각(臨淸閣) 정침(正寢)



임청각 정침은 안동시내에서 안동댐 방면으로 조금 들어가다 길 왼편에 동서로 길게 늘어져 있다. 임청각의 대지는 남북으로 짧고, 동서로 길고, 남쪽은 낮고 북쪽은 높은 경사지고 동쪽이 서쪽보다 약간 높다. 조선시대에는 낙동강변까지 임청각이었다고 하니 현재보다 많이 넓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지의 전면에는 4미터의 도로가 지나고 도로 넘어서 중앙선 철도가 놓여 있다. 철도를 지나 18미터 지나면 도로가 있고, 그 넘어 낙동강이 흐른다. 임청각의 대지 내에서는 가장 서쪽에 정침이 있고, 중간에는 군자정이 있고, 가장 동쪽에는 사당이 있다.

임청각 정침에서는 한말의병장이자 만주 독립운동을 이끌던 이상룡(李相龍)이 태어났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가의 멸망으로 인식하고 일제를 토벌하기 위해 군자금 조달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방략과 대책을 제시하면서 적극적으로 투쟁하였다.

1910년 8월 조선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자 이상룡은 신민회(新民會)와 더불어 서간도 이주계획을 세우고, 1911년 1월 5일 가솔과 가까운 친척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이상룡은 서간도 망명 직후인 1911년 4월 유하현 삼원포에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때 유인식(柳寅植)은 교육부장을, 김동삼(金東三)은 조직과 선전을 담당하였다. 경학사는 1913년 공리회(共理會)를 거쳐 1916년에는 부민단(扶民團)으로 개편되었다. 또한 그는 서간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청년들을 모아 경학사 부속기관으로 설치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통해 청년들을 훈련시켰다. 그 후 고산자에 토지를 구입하여 학교를 신축하고 본교를 두었다. 이것이 뒷날 신흥중학교(新興中學校),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발전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게 된 것이다. 이상룡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대동역사>>를 비롯하여 여러 편의 역사관련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정침 영역은 마당 영역과 군자정 영역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 정침을 중심으로 북쪽과 서쪽에 텃밭이 있으며 동쪽과 서쪽에 각각 계단이 있다. 정침 영역의 위치는 석축에 의해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석축은 정침을 가로질러 있으며 정침의 뒷부분에 하나 더 있다. 청침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곳은 남쪽 전면이며 창고와 고방 등이 있으며 마당과 같은 위치에 있다. 정침을 가로지르는 석축 위에 안방과 사랑방 등이 있으며 서쪽에는 텃밭이 있으며 군자정과 같은 높이에 있다. 가장 높은 곳은 정침 뒤 석축 위에 있는 텃밭이다. 정침이 경사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석축을 쌓아 높이를 달리하여 일조량을 높였다. 정침은 用자형의 배치를 가지며 남향을 하고 있다. 정침은 마당을 중심으로 나누어 질 수 있는데 동쪽 상단은 사랑마당을 중심으로 하는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에서 서쪽의 대문으로 들어가면 안채마당이 있다 안채마당의 북쪽에는 대청과 안방 등이 있으며 안채마당의 서쪽에는 다시 안행랑마당이 있다. 안행랑마당의 구역을 안행랑채라고 한다. 또한 안행랑채의 남쪽 아랫단에는 바깥행랑마당이 있고 바깥행랑채가 있고, 그 옆으로 마당을 달리하는 바깥행랑채가 연이어 있다.

안마당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대문을 지나 서쪽의 계단을 통해 사랑방으로 이르게 되며 사랑마당의 서쪽에 있는 정침대문을 통해 안마당으로 이르게 된다. 이밖에 부수적으로 정침 내로 진입할 수 있는 문이 있으나 다른 마당을 거쳐 안마당으로 이르게 된다. 남녀를 구별하는 유교적인 인식에 의해 계획되어 있었으므로 정침의 구조는 안방이 있는 안마당을 출입하기 위해서 여러 단계를 거쳐야하는 폐쇄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

임청각 정침은 用자형의 평면 형태로 구자정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 정침은 동쪽의 사랑채와 그 안쪽의 안채, 안행랑채, 바깥행랑채와 5개의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낮은 곳에는 행랑채와 창고 등이 있고, 그 위쪽으로는 안채, 사랑채가 위치해 있어 신분에 따라 주택의 구성을 달리하고 있다.

정침의 기단은 자연석 쌓기로 되어 있으며 바깥행랑채 전면은 2단의 기단으로 되어 있고 다른 곳은 하나의 단으로 되어 있다.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하였고 기둥은 모두 각주로 사용하였다. 정침은 대부분 3가량으로 되어 있으나 안채의 대청은 5가량에다 퇴량이 덧붙여진 형식이다. 또한 안채의 대청에만 보아지가 보인다.

사랑채의 대청과 안채의 대청은 2칸으로 되어 있으며 북쪽에는 온돌방들로 되어 있고, 남쪽에는 창고와 헛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쪽의 남쪽부분은 중층의 구조를 가지고 있어 위층은 마루로 고상식의 창고 형식이며, 아래층은 문이 없는 개방형으로 흙바닥으로 되어 있다. 정침은 굴도리와 납도리를 같이 사용하였으며 안채의 대청을 포함하여 일부에는 장여도 사용되었으며 도리뺄목에 단여가 사용된 곳도 있다. 정침의 지붕은 완결형의 뜰집이라 지붕마루가 모두 연결되어 있고, 맞배지붕이다. 그러나 안채의 지붕부분만 솟을 지붕처럼 높게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정침은 규모가 커서 다양한 창호가 사용되었으며, 창호의 아름다움은 이미 알려져 있다. 특히 남측면은 11칸에 같은 모양의 고정창을 동일한 위치에 사용하고 인방의 위치를 달리하여 2칸에 다른 종류의 문과 벽체를 사용하여 리듬감을 살린 것이 유명하다.

스토리가이드

주제 : 추구

인물 : 문중 사람들, 고성 이씨 선산 부근 마을 사람들. 승려

배경 : 고성 이씨 선산



줄거리

안동의 고성 이씨 선산은 누운 소 모양으로, 선조 이증의 무덤이 누운 소의 뿔, 그 부인의 묘가 소의 유방에 해당하는 곳이다. 여기에 묘를 쓴 이래 가문이 번성한다. 그런데 정작 묘소 부근의 주민들은 줄 이은 참배객 때문에 괴로움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때 한 중이 주민들에게 큰 시주를 받고는, 산 맞은편 등겨 모양의 바위가 소의 식량이 되므로 이씨 가문이 번창함을 알려주어서 주민들이 그 바위를 부셔버린다. 이씨들이 깨진 바위를 모아 다시 옛날처럼 했지만 그 뒤로 말단 벼슬 밖에 나지 않았다.



이야기 자료

<자료1>

<<안동의 독립운동사>>, 김희곤, 안동시



그(이상룡)는 1911년 2월 5일 친척들에게 주연을 베풀어 자신의 뜻을 알리고 뒷일을 부탁했으며, 다음날 일찍 가묘에 예를 올리고 거국시(去國詩)를 읊고 망명길에 올랐다 (중략) 그의 동생 봉희(鳳羲)를 비롯해, 아들 준형, 손자 병화, 조카 문형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상룡은 압록강을 건너면서 비장한 심정을 다음과 같은 시로 읊었다.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워 나의 살을 에는데

살은 깎여도 오히려 참을 수 있고

창자는 끊어져도 차라리 슬프지 않다.

옥토 삼천리와 이천만 백성의 극락같은 부모국이

지금 누구의 차지가 되었는가.

차라리 이 머리 잘릴지언정

어찌 내 무릎을 꿇어 그들의 종이 될까보냐.

집을 나선 지 한 달이 못되어 압록강 물을 건넜으니

누가 나의 길을 더디게 할까보냐

나의 호연한 발걸음을’



<자료2>

<<안동시사5-안동의 인물>>



이상룡은 본관이 고성으로 자는 만초(萬初), 호는 석주(石州)이다. 1905년 유인식, 김동삼 등과 대한협회 안동지부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어 계몽강연, 협동학교 설립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1년 만주로 이주해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하여 애국청년들을 훈련시켰다. 서로군정서의 최고책임자인 독판에 취임하여 농촌청년들을 훈련시켜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다.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피선되었다. 광복단체의 통합과 단결에 주력하다가 병을 얻어 이국에서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