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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죽서루
정자 죽서루

정자 죽서루

일반정보

관동 팔경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경치



죽서루가 누구에 의해 최초로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명종 때의 문인 김극기의 죽서루 시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누각의 건립 목적을 현존 상태로 파악하면, 문루를 세워서 외적의 공격에 대비하고 감시를 위한 군사적 기능을 가진 것이 가장 많다. 또 교육적, 종교적 회합장소로서의 기능과 순수한 접대나 향연을 위한 누각으로 그 종류를 대별할 수 있다. 그런데 죽서루는 관청인 객사의 부속건물로서 접대와 휴식, 향연을 주목적으로 한 누각이라 할 수 있다.



천연 바위 위에 세워진 큰 누각



삼척 죽서루는 정면 7칸, 측면 북측 2칸, 남측 3칸의 누건물이다. 천연의 암반을 주초석으로 삼았기 때문에 누하의 기둥 높이는 제각각으로 밑면을 그랭이질하여 암반에 밀착시켰다. 중앙 5칸의 공포는 첨자가 교두형으로 된 주심포식 공포이고, 좌우 끝단 1칸의 공포는 익공식으로 서로 다르다. 이러한 모습은 모두 이 죽서루가 본래 정면 5칸에 좌우 1칸씩 증축했기 때문이라 추정하고 있다. 지붕은 현재 겹처마 팔작지붕이지만 본래 5칸이었을 때는 맞배지붕이었다고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선시대 초기의 변형된 건축물이지만 자연과 합일되는 구조를 이루고 있는 누건축이다.

전문정보

관동지방을 대표하는 누각, 죽서루(竹西樓)



죽서루가 누구에 의해 최초로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명종 때의 문인 김극기(金克己)의 죽서루 시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죽서루>란 이름은 누 동쪽에 대나무 숲이(竹林) 있었고, 그 숲 속에 죽장사(竹欌寺)가 있었다 하여 죽서루라 했다는 설과 누각 동편에 죽죽선녀(竹竹仙女)의 유희소가 있었다 하여 죽서루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누각의 건립 목적을 현존 상태의 것들로 파악하면, 문루를 이루어 적의 공격에 대한 방비와 감시를 위한 군사적 기능을 가진 것이 가장 많다. 교육적, 종교적 회합장소로서의 기능과 순수한 접대나 향연을 위한 누각으로 그 종류를 대별할 수 있는데, 죽서루는 객사의 부속건물로서 접대와 휴식, 향연을 주목적으로 한 누각이라 할 수 있다.

죽서루는 세종 3년(1403) 부사 김효손(金孝孫)이 옛 터에다 새로 고쳐 지은 이래 1980년까지 25차례의 중수, 증축, 개조, 단청 등이 있었으며, 1982년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의 지시로 죽서루를 확장하여 지금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누각 전면에 걸린 <죽서루(竹西樓)>와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 제액은 부사 이성조(李聖肇)의 글씨이며,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戲之所)>는 부사 이규헌(李奎憲)의 글씨이다.

죽서루는 관동팔경 중 1경으로 기암괴석의 벼랑 위에 건축하기 위해 자연암반을 기초로 건축했다. 누각 아래층은 17개의 기둥이 있는데 그 중 9개의 기둥은 자연암반 위에 세웠고, 나머지 8개는 석초 위에 세웠는데, 17개의 기둥 길이가 모두 다르다. 상층은 7칸으로 구성된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죽서루에서 바라보는 경색은 멀리 태백준령이 한 폭의 병풍처럼 펼쳐 있고, 가까이는 근산 갈야산 봉황산이 솟아 있어, 누각을 에워싸고 있다. 오십굽이나 휘돌아 쳐 흘러내려온 오십천은 누각 밑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부딪힌다. 죽서루 주변에는 고려시대의 죽장사, 조선시대의 진주관, 응벽헌, 연근당, 서별당 등의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많이 세워져 있다.

죽서루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의 중수, 증축, 중창, 단청 등의 보수공사를 했으므로 그에 따른 중수기, 중건상량문 등의 기록 또한 많이 있었겠지만, 현존하는 것은 5편뿐이다. 그 가운데서 문헌에 실려 전하는 것은 1848년경 간행된 김종언(金宗彦)의 <척주지(陟州志)>에 삼척부사 서탁수가 쓴 중수기 1편뿐이고, 나머지는 죽서루에 게첨된 편액으로 남아 있다.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1788년 서탁수의 중수기, 1921년의 이학규의 중수기, 1947년 홍백련의 중수기, 1971년 홍종범의 중건상량문, 1991년 김광용의 중수기가 된다. 죽서루의 중수기는 죽서루의 옛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귀중한 역사자료이다.

죽서루를 소개한 문헌자료들은 현재 많이 남아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 地理誌)>>(1454년)에는 이런 기록이 전한다. “죽서루는 읍성 가운데 있다. 팔경이 있는데, 죽장고사(竹欌古寺) 암공청담(岩控淸潭) 의산촌사(依山村舍) 와수목교(臥水木橋) 우배목동(牛背牧童) 농두엽부(隴頭饁婦) 임류수어(臨流數漁) 격장호승(隔墻呼僧)이라 하여, 옛 어진 이들의 기사가 많이 남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객관 서쪽에 있다. 절벽이 천 길이고 기이한 바위가 총총 섰다. 그 위에 누를 지었는데 죽서루라 한다. 아래로는 오십천이 임했고 냇물이 휘돌아서 못을 이루었다. 물이 맑아서 햇빛이 밑바닥까지 통하여, 헤엄치는 물고기도 낱낱이 헤아릴 수 있어서 영동절경이 된다.(중략)”

<<택리지(擇里志)>>(1750-1751)에는 이렇게 전한다. “삼척의 죽서루는 오십천을 차지하여 경치가 훌륭하다. 절벽 밑에는 안보이는 구멍이 있어, 냇물이 그 위에 이르면 새서 낙숫물지듯 하고 남은 물은 누 앞 석벽을 지나 읍 앞을 흘러간다. 옛적에 뱃놀이하던 사람이 잘못하여 구멍 속으로 들어갔는데 간 곳을 모른다 한다. 어떤 사람은 ‘읍터가 공망 혈에 위치하므로 인재가 나지 않는다’한다.”

죽서루에는 임금의 어제시를 비롯하여 유명한 시인과 명신들의 주옥같은 한시들로 가득 하다. 1959년 9월 17일 사하라태풍으로 많이 유실되고, 현재는 27점뿐이다. 이를 종류별로 구분하면 제액 5점, 중수기 3점, 중건상량문 1점, 중건기부금방명기 1점, 기문 1점, 한시 16점이다. 이 중에서 율곡 이이, 정조이제시, 이구의 작품은 1992년 일중 김충현이, 정철의 작품은 일죽 홍태의가 다시 써 게첨한 것이다.

삼척 죽서루는 정면 7칸, 측면 북측 2칸, 남측 3칸의 누건물이다. 천연의 암반을 주초석으로 삼았기 때문에 누하의 기둥 높이는 제각각으로 밑면을 그랭이질하여 암반에 밀착시켰으며 누하부의 기둥직경은 상층보다 굵게 사용하였다. 중앙 5칸의 공포는 첨자가 교두형으로 된 주심포식이고, 좌우 끝단 1칸의 공포는 익공식으로 서로 다르다. 또 5칸의 공포는 이출목으로 보 뺄목이 이 이출목 위에 놓여 외목도리를 직접 받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모두 이 죽서루가 본래 정면 5칸에 좌우 1칸씩 증축했기 때문이라 추정하고 있다. 대들보 위의 동자기둥이 공포로서 대신하여 종보를 받치고, 종보 위에는 파련대공으로 종도리를 받치고 있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지붕은 현재 겹처마 팔작지붕이지만 본래 5칸이었을 때는 맞배지붕이었다고 추정된다. 누마루의 밖은 계자난간을 둘렀는데, 양 측면 중앙은 난간을 두르지 않아 이곳으로 사람들이 누에 드나들게 하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선시대 초기의 건축이면서 변형된 부분이 많으나 강가 암반 위에 기단을 형성하지 않고, 또 일부 초석들을 두지 않고 기둥들을 세움으로서 자연과 합일되는 구조를 이루고 있는 누건축이다.

스토리가이드

주제 : 사랑

인물 : 여류시인 이원, 삼척부사 조원

배경 : 죽서루



줄거리

여류시인 이원은 일찍이 청상과부가 되어 자연을 노래하며 고독을 달래던 중 남명 조식의 제자인 조원을 알게 된다. 그녀는 조원을 흠모한 나머지 스스로 소실이 되어 삼척부사로 부임한 그를 따라 삼척에 온 이래 죽서루를 비롯한 부근의 명승을 시로 읊는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소도둑의 누명을 쓴 부녀의 송사를 돕다 공무에 개입했다고 조원의 노여움을 받아 쫓겨난다. 이후 그녀는 여도사로 자칭하고 시를 지으며 떠돌다 임진왜란 후 종적이 끊긴다.



이야기 자료

<자료1>

<복거총론(卜居總論)-산수(山水)> <<택리지(擇里誌)>>



삼척의 죽서루는 오십천을 차지하여 경치가 훌륭하다. 절벽 밑에는 안 보이는 구멍이 있어 냇물이 그 위에 이르면 새서 낙숫물 지듯 하고, 남은 물은 누 앞 석벽을 지나 흘러간다. 옛적에 뱃놀이 하던 사람이 잘못하여, 구멍 속으로 들어갔는데 간 곳을 모른다 한다.



<자료2>

<삼척도호부-누정>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4



죽서루는 객관 서쪽에 있다. 절벽이 천 길이고 기이한 바위가 총총 섰다. 그 위에 날 듯한 누를 지었는데 죽서루라고 한다. 아래로 오십천을 임했고, 냇물이 휘돌아서 못을 이루었다. 물이 맑아서 햇빛이 밑바닥까지 통하여, 헤엄치는 물고기도 낱낱이 헤아릴 수 있어서 영동절경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