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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석조구조물

석조장식
분묘 장식물 묘비
이완장군묘소 묘비
이완장군묘소 묘비_1 돋보기
분묘 장식물 묘비

분묘 장식물 묘비

일반정보

주인의 삶을 보여주는 묘소의 기념비



묘비는 봉분의 앞이나 상석 오른쪽에 세우는 묘표로 묘소 주인의 행적을 기록한다. 처음에는 나무로 만든 비를 사용했지만 후대에는 돌로 만든 비석을 많이 사용하였다. 조선시대가 되면 고관이 아니더라도 일반 사대부의 묘에도 간단한 묘비는 세울 수 있고, 서민의 묘에는 분구만 만들고 석물을 설치하지 못하는 제도가 있었다. 묘 앞에 세우는 묘비는 분묘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그 형태와 비문의 내용 등도 시대에 따라 변화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무덤의 위치를 표시하는 기능이었다. 점차 죽은 이를 추모하고 살았을 때의 공적을 찬양하는 성격으로 바뀌었다. 마침내는 사회적 신분을 과시하는 징표가 된 듯하다.



다양한 형태의 묘비



일반 묘비는 규수, 가관, 규(호패식), 옥개비 등이 있다. 초기에는 대좌 위에 윗면의 모를 접어 각을 세운 규수비가 주로 세워졌다. 중기에는 가관비(비석 위에 관모양이나 복련 등을 씌운 형태)가 주로 세워졌다. 다음으로는 위쪽을 둥글게 만든 호패식 규비가 유행하다가 지붕 모양의 관석이 있는 옥개형으로 변천되었다.

묘비석과 함께 묘소의 주인공의 이름과 행적을 새겨서 오랜 세월 뒤에 그 내용이 전하도록 땅에 파묻는 비석을 지석이라고 한다.

전문정보

묘소 주인의 행적을 기록한 묘비(墓碑)



묘비는 봉분의 앞이나 상석(床石) 오른쪽에 세우는 묘표로 묘소 주인의 행적을 기록한다.

처음에는 나무로 만든 비를 사용했지만 후대에는 돌로 만든 비석을 많이 사용하였다. 조선시대가 되면 고관이 아니더라도 일반 사대부의 묘에도 간단한 묘비는 세울 수 있고, 서민의 묘에는 분구(墳丘)만 만들고 석물(石物)을 설치하지 못하는 제도가 있었다.

묘 앞에 세우는 묘비는 분묘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그 형태와 비문의 내용 등도 시대에 따라 변화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무덤의 위치를 표시하는 기능(안동 배상지묘 참조)이었다. 그러다가 점차로 죽은 이를 추모하고 살았을 때의 공적을 찬양하는 성격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사회적 신분을 과시하는 징표가 된 듯하다.

많은 돈을 들여서 석물을 마련하고 저명한 문장가에게 글을 받아서 당대 명필의 글씨로 화려한 비를 세우게 되니, 조선 후기로 오면서 이미 세워져 있는 선대의 옛 묘비를 고치는 경우가 많아졌다.

묘비의 앞쪽 큰 글씨(大字)의 고비(考妣, 돌아가신 여자 선조)의 표기도 배위(配位)를 오른쪽에 쓴 곳도 있고 왼쪽에 쓴 곳도 있다. 문체는 대개 산문으로 된 서문과 운문인 명(銘)으로 구성돼 있다. 지은이에 따라 묘주인의 가계를 먼저 쓴 것도 있고 공덕부터 쓰고 나서 쓰는 경우도 있다. 운문의 경우도 4언, 5언, 7언 등 일정하지 않다.

일반 묘비는 규수(圭首) 가관(加冠) 규(圭, 호패식) 옥개비(屋蓋碑) 등이 있다. 초기에는 대좌 위에 윗면의 모를 접어 각을 세운 규수비가 주로 세워졌다. 중기에는 가관비(비석 위에 관모양이나 覆蓮 등을 씌운 형태)가 주로 세워졌다. 다음으로는 위쪽을 둥글게 만든 호패식 규비가 유행하다가 지붕 모양의 관석(冠石)이 있는 옥개형으로 변천되었다.

묘비석과 함께 묘소의 주인공의 이름과 행적을 새겨서 오랜 세월 뒤에 그 내용이 전하도록 땅에 파묻는 비석을 지석(誌石)이라고 한다.

비교대상

이완장군묘소 묘비



이완장군묘는 시도유형문화재 1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상거리 19-1번지에 위치한다. 이완장군은 조선 효종 때의 무신으로 162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봉분의 오른쪽에는 방부이수비로 된 묘비가 서 있다. 묘비는 크게 방부, 비신, 이수부분으로 되어 있다. 방부는 윗면에는 복연장식이 되어 있으며, 사방 구름무늬를 더해 장식하였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글씨가 사방에 새겨져 있다. 이수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으로 앞뒷면이 같게 조각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비례가 잘 맞고 아름답다.



안제묘소 묘비



안제묘는 경북 안동시 와룡면 중가구동 가느실에 위치한다. 중가구동 길 한쪽편으로 가파른 언덕 중턱에 있다. 안제는 1561년 사마시 합격, 1580년 문과 급제, 성균관 학유, 사헌부 감찰, 사섬시첨정, 형조좌랑, 충청도사, 용궁현감 등을 지냈다. 안제묘의 묘비는 가관식으로 되어 있고, 크게, 방부, 비신, 가관으로 되어 있다. 방부는 지형이 급경사로 이루어져 있어 정면이 높게 되어 있고, 정면과 옆면에 기하학무늬가 있다. 비신에는 정면에 글씨가 새겨져 있고, 삼면은 마모가 심해 알아 볼 수 없다. 가관은 둥글게 모자를 쓴 것처럼 되어 있으며, 굵은 선을 이용해 형태를 잡았다.



퇴계묘소 묘비



퇴계묘소는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건진산 남쪽에 위치한다. 퇴계 이황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다. 퇴계묘소는 산의 정상에 있다. 퇴계묘소의 묘비는 방부이수비의 변형된 형태이다. 구성은 방부, 비신, 이수부분으로 되어 있다. 방부에는 비신과 만나는 부분만 방형의 선을 두고 그 외에는 따로 장식한 흔적이 없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이황의 업적이 적혀 있다. 이수는 일반적인 용문양이 아닌 구름무늬로 장식되어 있는 것이 특징인데, 그 형태도 고깔을 씌운 모양이다. 구름형태를 앞뒤가 같고, 좌우가 서로 대칭되게 조각하여 놓았다. 전체적인 비례가 잘 어울리며, 이수부분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