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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주택
대장간
대장간

대장간

일반정보

달구고 두드려서 농기구를 만들고 고치는 곳



대장간은 풀무를 차려 놓고 철, 구리, 주석 등 금속을 달구고 두드려 연장과 기구를 만드는 곳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장인이 대장장이인데 딱쇠, 대정장이, 성냥, 바지, 야장, 철장이라고도 한다. 옛날에는 시골 장터나 마을 단위로 반드시 대장간이 있어 무딘 농기구나 갖가지 연장을 벼리기도 하고 새로 만들기도 하였다. 농어촌에서 대장간은 없어서는 안 될 장소이다. 불을 피우는 풀무는 손풀무와 발풀무가 있는데, 발풀무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대장간에는 풀무 외에 모루, 정, 메, 집게, 대갈마치, 숯 등이 갖추어진다. 대장간이 없는 마을로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연장을 벼루는 떠돌이 대장장이도 있었다.



헛간의 변형으로서 고열의 금속을 다루는 공간



대장간의 구조는 일반 민가에 있는 헛간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 금속을 다루기 위해서 최소한의 바람막이를 가진 트인 공간 속에 밀폐된 공간인 풀무를 설치하였다. 이렇게 트인 공간이 필요한 것은 고열로 달구어진 금속을 빨리 식힐 뿐만 아니라 열기 속에서 일하는 대장장이가 너무 덥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풀무에 필요한 공기를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서이다. 진흙으로 만든 밀폐형 풀무는 금속을 고열로 달구기 위한 것이다. 대장간에는 이밖에도 풀무에서 달구어진 금속을 열이 식기 전에 일정한 모양으로 다듬고 강도를 높이도록 하는 모루, 정, 메, 집게 등의 연장이 갖추어져 있다.

전문정보

농업시대에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의 제작소이며 정비소인 대장간



대장간은 풀무를 차려 놓고 철, 구리, 주석 등 금속을 달구고 두드려 연장과 기구를 만드는 곳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장인을 대장장이라 한다. 딱쇠, 대정장이, 성냥, 바지, 야장(冶匠), 철장(鐵匠)이라고도 한다. 옛날에는 시골 장터나 마을 단위로 반드시 대장간이 있어 무딘 농기구나 각종 연장을 불에 달구어 벼리기도 하고 새로 만들기도 하였다. 자급자족하는 농어촌에서는 대장간은 필수적인 존재였다. 풀무는 손풀무와 발풀무가 있는데 발풀무가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대장간에는 풀무 외에 모루, 정, 메(앞메와 옆메), 집게, 대갈마치, 숯 등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진다. 대장간이 없는 마을로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연장을 벼루는 떠돌이 대장장이도 있었다.

대장간의 구조는 일반 민가에 있는 헛간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건축적 변형은 금속을 다루기 위한 용도에서 비롯되었다. 최소한의 막이를 가진 개방된 공간과 그 공간 속에 다시 밀폐된 공간인 풀무를 가지고 있다. 최소한의 막이만 가지는 개방된 공간은 고열로 달구어진 금속을 빨리 식히고 고열 속에 일하는 대장장이의 체온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다. 그리고 풀무에 필요한 원활한 공기의 공급을 위해서다. 진흙으로 만든 밀폐형 풀무는 금속을 고열로 달구기 위한 것이다.

대장간 혹은 대장장이의 역사는 청동기의 출현과 동시에 등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기록상 최초의 야장은 신라의 석탈해(昔脫解)였다. 신라에는 철유전(鐵鍮典), 축야방(築冶房)과 같은 관청이 있어서 무기, 생활용품, 농기구 등을 제작하였다. 그러므로 이미 이때 많은 대장장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시대의 절에서는 불상과 종의 주조기술을 가진 사노(寺奴)가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관직제도에서 여러 장(匠) 가운데 홀대대장(笏袋大匠), 연장(鍊匠), 전장(箭匠) 등은 대장간을 관장하던 관리로 여겨진다. 조선시대의 <<경국대전>> <공전(工典)>에는 서울에 192명, 지방에 458명의 야장, 즉 대장장이가 각 관청에 배치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숫자는 정확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조선 초기에는 야장이 부족하여 일반군인과 포로로 잡은 왜인(倭人) 야장을 사역시키기도 하였다. 야장은 다시 유철장(鍮鐵匠), 주철장(鑄鐵匠), 수철장(水鐵匠)으로 나누어지고, 그 중 무쇠를 다루는 수철장은 대로야(大爐冶), 중로야(中爐冶), 소로야(小爐冶)로 구분되어 각기 솔거인(率居人)을 거느렸다. 이와 같은 야장의 세분화는 금속가공기술 발달의 결과이며, 이에 따라 조선 후기에 와서 대장장이라고 하면 수철장만을 일컫게 되었다. 그들 중 오로지 관청수공업장에서만 사역당하는 대장장이도 있었다. 그런데 스스로 농기구 등을 만들어 장시(場市)에 상품으로 판매하거나 물물교환으로 생활하면서 관청의 사역에 때때로 응하던 자들이 많았다. 관청수공업이 붕괴되던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오히려 후자의 경우가 압도적이었으며, 그들은 호조에 장세(匠稅)로 포 1필을 납부하면 되었다. 그렇지만 실제적으로는 장역(匠役)이 없어지지 않았고, 장세와 함께 큰 부담이 되었으므로 농기구의 생산을 촉진하기 위하여 장세를 면제하려는 정부의 논의도 있었다. 조선 전기 대장장이의 신분은 양인과 천인이었다. 후기에 들어서는 거의 양인화하여 관청의 사역에서 벗어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대장장이라는 직업은 끝내 천대를 면하지는 못하였다.

그들의 작업장인 대장간에는 풀무와 화로가 기본적인 설비이고, 그 밖에 풀무에서 달구어진 금속을 열이 식기 전에 모루 위에 놓고 쇠망치나 정으로 일정한 모양으로 다듬고 강도를 높이도록 하는 메, 집게, 숫돌 등의 연장이 갖추어져 있다. 작업과정을 살펴보면 풀무로 화로의 불을 피워 쇠를 달군 뒤 모루에 올려놓고 쇠망치로 메질을 하다가 물이 담긴 커다란 함지박에 넣어 담금질을 계속한다. 그런 다음 만들 제품의 크기에 따라 시우쇠를 토막 내는데, 이를 ‘깜을 잡는다’고 한다. 깜을 잡은 뒤 화로에 넣어 풀무질로 쇠를 익혀서 손잡이 속에 들어간 부분인 수메(슴베)를 들이고 다시 날을 괸다. 다음에 괸 날을 오그리고 다듬어 자루를 박는다.

비교대상

상도세트장 대장간



상도세트장은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면 삼덕리 경천대에 세워졌다. 이 세트장에는 대장간을 비롯하여, 주막과 상점이 있다. 대장간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초가지붕이다. 낮은 1단의 기단 위에 막돌로 된 초석이 놓여 있고, 그 위에 다시 원주를 세웠다. 한 칸은 쇠를 녹이고 단련시키는 장비가 있고, 한 칸은 쇠로 만든 농기구를 판매할 수 있도록 좌판이 만들어져 있다. 벽면은 대장간 안의 열기를 배출할 수 있도록 살창을 좌우에 달아 환기를 원활히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좌측면에 반 칸의 덧 칸을 달아 나무를 쌓거나,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낙안읍성 대장간



낙안읍성은 사적 30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남 순천시 낙안면 동, 서, 남내리에 걸쳐 있는 조선시대의 성곽유적이다. 낙안읍성 안에는 관아시설과 민가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많은 상점들 가운데 대장간이 복원되어 있다. 대장간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초가지붕 구조이다. 실제 농기구와 생활 도구를 만들고 있는 곳으로 활용되고 있어, 옛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정면에는 문 없이 공간이 열려있고, 뒷벽에는 들창을 달아 열기를 환기할 수 있도록 하였다. 벽면은 높은 열기를 견딜 수 있도록 돌과 황토를 섞어 만들었다. 좌측 칸은 쇠를 달구는 풀무가 설치되고, 그 외벽에는 굴뚝을 만들어 놓았다.



김득신 대장간



풍속화를 통해 조선시대의 대장간을 살펴볼 수 있다. 대장간을 소재한 그림이 두 점 있는데, 하나는 김홍도의 <대장간>이며, 다른 하나가 김득신의 <대장간>이다. 김득신은 김홍도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화가로 김홍도의 그림과 유사하지만, 김홍도에 비해 먹선이 가늘고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김득신의 <대장간>은 김홍도의 <대장간>과 달리 가옥이 그려져 있어 대장간의 모습을 확인하는 데는 더 유용하다. 이 그림의 대장간은 풀무질을 하는 사람들 사이로 배경이 보인다. 작업공간을 위한 넓은 마당과 작업을 위한 기단이 조성되어 있다. 쇠를 달구는 풀무가 초가 안에 위치하고 있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