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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 만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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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 만년교

영산 만년교

일반정보

경남 영산에 있는 무지개다리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 있는 무지개다리이다. 이 다리는 석공 백진기가 조선 정조 4년(1780)에 처음 쌓은 것을 그 후 고종 29년(1892) 4월에 현감 신관조가 석공 김내경을 시켜서 중수하였다. 1780년에 주민들이 남천석교비를 다리 입구에 세워 놓고 원님의 공을 기려 일명 ‘원다리’라고 부르고 있다. 입구에는 또 하나의 교비가 있는데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만년교가 처음 완성될 무렵 13세의 신동이 남산에 살고 있는 산신의 계시를 받아썼다는 비석이라고 하는데 ‘만년교 십삼세교’라고 쓰여져 있다.



커다란 무지개의 자연스런 조화를 추구한 서민의 다리



마을 실개천 위에 무지개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돌다리이다. 개천 양쪽의 자연 암반을 바닥돌로 삼고 그 위에 잘 다듬어진 화강암을 32개 층으로 층층이 쌓아 무지개 모양의 반월을 이루고 있다. 노면은 곡선을 그리며 양 끝에 길게 늘이고 있어 다리의 분위기를 한결 아늑하게 해준다. 만년교는 장방형의 암석을 서로 잇대어 둥근 아치형을 만들고 그 위에 모양이 일정치 않은 돌을 쌓고 그 틈에 흙을 쌓아 완만한 곡선을 이루도록 다리 모양을 내고 있다. 그래서 원다리라고도 부른다. 흙을 깐 양쪽에는 풀이 자라 자연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어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꾸밈새 없는 서민적인 다리이다.

전문정보

남부지방 홍예교(虹霓橋)의 전형을 보여준 만년교(萬年橋)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 있는 무지개 다리. 이 다리는 석공 백진기(白進己)가 조선 정조 4년(1780)에 처음 쌓은 것을 그 후 고종 29년(1892) 4월에 현감(縣監) 신관조(申觀朝)가 석공 김내경(金乃敬)을 시켜서 중수하였다. 1780년에 주민들이 남천석교비(南川石橋碑)를 다리 입구에 세워 놓고 원님의 공을 기려 일명 ‘원다리’라고 불렀다. 입구에는 또 하나의 교비가 있는데 주민들 사이에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만년교가 처음 완성될 무렵 13세의 신동이 남산에 살고 있는 산신의 계시를 받아 썼다는 비석이라고 하는데 ‘만년교 십삼세교(萬年橋 十三歲橋)’라고 쓰여져 있다. 이 다리 하류에는 신관조 현감이 만년교를 중수하고 나서 만든 연지(硯池)라는 인공 호수가 있고 향미정(杭眉亭)이라는 정자가 물 가운데 있어 절정을 이룬다.

마을 실개천 위에 무지개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돌다리로, 실개천이 남산에서 흘러내린다 하여 ‘남천교(南川橋)’라고도 불리운다. 개천 양쪽의 자연 암반을 바닥돌로 삼고 그 위에 잘 다듬어진 화강암 편단석(扁單石)을 32개 층으로 층층이 쌓아 무지개 모양의 반월(半月)의 홍예(虹霓)를 이루고 있다. 홍예를 만든 재료는 화강석 각재(角材)이며 전후 양측의 교벽(橋壁)은 자연 잡석을 난간 쌓기로 쌓았다. 홍예 머릿돌 위에는 비교적 규격이 큰 정형의 각석(角石)을 배열하였고 홍예의 석축 위는 상승각도가 원만한 부토층(敷土層)으로 되었으며 난적석벽(亂積石壁)은 더욱 길게 전후로 연장되어 날개벽(翼壁)도 형성되어 양쪽 언덕의 통로와 연결되어 있다. 그 위로는 둥글둥글한 자연석을 쌓아 올리고 맨 위에 얇게 흙을 깔아 다리 위로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았다.

노면은 곡선을 그리며 양 끝을 길게 늘이고 있어 다리의 분위기를 한결 아늑하게 해준다. 지금도 마을 사람들이 통행할 만큼 튼튼하여 홍수 등에도 전혀 피해가 없다고 한다.

만년교는 장방형의 암석을 서로 잇대어 둥근 아치형을 만들고 그 위에 모양이 일정치 않은 돌을 쌓고 그 틈에 흙을 쌓아 완만한 곡선을 이루도록 다리 모양을 내고 있다. 그래서 원다리라고도 부른다. 흙을 깐 양쪽에는 풀이 자라 자연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어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꾸밈새 없는 서민적인 다리이다.

이 다리는 단칸 홍예교로 선암사 승선교(仙巖寺昇仙橋), 흥국사 홍교(興國寺虹橋), 벌교홍교(筏橋虹橋) 등과 아울러 희귀한 유구인 동시에 조선 후기 남부지방의 무지개다리(홍예교) 구축기술을 보이는 예로 학술적 가치가 크다.

스토리가이드

주제 : 구출

인물 : 공민왕, 공민왕의 공주, 안도의 부녀자들

배경 : 낙동강 부근



줄거리

공민왕이 몽고군을 피해 안동에 왔다가 강을 건너려다 다리가 없어서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러나 시기가 시기인지라 그냥 물을 건너야하는 상황이다. 이때 안동의 부녀자들이 귀한 공주가 맨발로 강을 건너가게 할 수 없다며 모여든다. 그리고는 부녀자들이 물 속에 들어가 허리를 구부려 사람다리를 만들어 공주가 등을 밟고 건너게 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놋다리밟기 풍속의 시작이다.



이야기 자료

<자료1>

<<조선왕조실록>> 영조 120 49/00/10(무술) 수표교에 행행하여 여경방에 들리다



임금이 수표교(水標橋)에 행차하여 여경방(餘慶坊)에 들렀다. 하천을 준설한 뒤로 성 안 여러 교량의 양안(兩岸)은 모두 나무로 엮은 것을 사용하되 1년에 한번씩 보수하니 그 비용이 많이 들어 마침내 돌로 쌓자는 논의가 있었다. 이에 3군문(軍門)에 명령하여 분담해서 쌓게 하고 이날 역사(役事)를 시작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친히 나와 살펴본 것이다. 이어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갔다. 일한재(日閑齋)에 나아가 시임 및 원임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자료2>

<<조선왕조실록>> 정조 025 12/01/15(무인) 경기 관찰사 서유방이 원릉, 영릉 행차시 가교로써 대신하기를 청하다



경기 관찰사 서유방(徐有防)이 아룄다.

“원릉(元陵)과 영릉(永陵)에 행차하실 때 가시는 길의 교량을 여러 읍에서 힘을 아울러 조성하였습니다만, 다리 하나를 세우는 비용이 수백 석(石)이 듭니다. 그런데 선혜청이 갑자기 그 예산을 줄였으므로 관민이 함께 곤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근방에 사는 백성들로 하여금 값을 받고 교량을 조성했다가 임금님의 행차가 돌아간 뒤에 이내 그 다리를 철거하여 그 재목을 다시 쓰도록 비축하게 하소서. 다음에 다리를 조성할 때 그 재목을 다시 쓸 경우에는 값을 반만 주고, 노정(路程)을 계산하고 기간을 한정하는 것으로 정식(定式)을 삼으소서.”

선혜청이 이 건의가 타당하다고 하니,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