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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 정려비
정려비(대리열녀각) 가상복원_0 돋보기
비석 정려비

비석 정려비

일반정보



충신과 열녀와 효자의 기념비

정려란 효자나 열녀, 충신 등의 행적을 높이 기리기 위해 그들이 살던 집 앞에 문을 세우거나 마을 입구에 작은 정각을 세워 기념하는 것을 말한다. 정려란 ‘정문’이나 ‘정표’ 등으로도 표기되어 있는데 같은 의미이다. 정려를 받는 절차는 그 고을의 관청이나 대상자의 직계후손이나 고을 유림들이 중앙의 예조에 정려를 내려주기를 청하면 왕명에 의하여 명정을 받게 된다. 따라서 명정을 받는 것은 개인이나 가문의 대단한 명예가 될 수 있고 아울러 그 마을의 자랑거리가 되기도 한다. 국가 통치정책의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의 기본도리를 깨닫게 하는 상징성이 강한 기념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단촐하고 의장을 줄인 기념비 건축

정려는 대체로 마을의 입구에 들어선다. 정려는 단지 개인에 대한 포상이지만 그 성격은 문중이나 마을의 경사로 여겨졌기에 정려의 위치는 대개 마을 입구의 길목에 위치한다. 한편 마을 입구에 비각의 형태로 존재하는 정려와는 달리 정려 받은 후손의 살림집 대문간 앞에 정문을 세워 기념하는 경우도 있다. 정려건축은 기능이 배제된 일종의 기념성 건축물이기 때문에 다른 유교건축과는 다르게 건물의 구성이 1개 동으로 우선 단촐하고 건축의 구조나 의장 등도 지역에 관계없이 공통적인 면이 많다.

전문정보

윤리도덕을 선양하는 정려비(旌閭碑)



정려(旌閭)란 효자나 열녀, 충신 등의 행적을 높이 기르기 위해 그들이 살던 집 앞에 문을 세우거나 마을 입구에 작은 정각을 세워 기념하는 것을 말한다.

정려란 ‘정문(旌門)’이나 ‘정표(旌表)’ 등으로도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표기되어 있는데 같은 의미이다. 정려를 받는 절차는 그 고을의 관청이나 대상자의 직계후손이나 고을 유림들이 중앙의 예조에 정려를 내려주기를 청하면 왕명에 의하여 명정(銘旌, 命旌)을 받게 된다. 따라서 명정을 받는 것은 개인이나 가문의 대단한 명예가 될 수 있고 아울러 그 마을의 자랑거리가 되기도 한다.

정려에 대한 기록은 신라 때부터 보이며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상당히 널리 시행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정려비가 세워졌다. 이는 유교적인 지배윤리를 뿌리내리고 도덕규범을 장려하기 위해서 매년 효자, 열녀, 충신들을 뽑아 예조에 보고하도록 하고 이를 표창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정려정책은 국가 통치정책의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사회의 윤리도덕을 확립하여 인간의 기본도리를 깨닫게 하는 상징성이 강한 기념물로 이해할 수 있다.

정려는 대체로 마을의 입구에 들어선다. 정려는 단지 개인에 대한 포상이지만 그 성격은 문중이나 마을의 경사로 여겨졌기에 정려의 위치는 대개 마을 입구의 길목에 위치한다. 길목이 아닌 경우에는 양지바른 야트막한 야산 아래에 건립한다. 이러한 장소적 특징은 효도하지 못한 사람이나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보고 뉘우쳐서 착한 사람이 되도록 인도하는 데도 그 목적이 있었다.

한편 마을 입구에 각의 형태로 존재하는 정려와는 달리 정려 받은 후손의 살림집 대문간 앞에 정문을 세워 기념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정문은 향교나 왕릉 앞에 일반적으로 건립되는 홍살문과 비슷한 형태의 상징적인 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현재 문 밖에 존재하는 정문은 없다.

명정의 내용은 나무판에 새겨 별도의 건물인 정각(旌閣)을 짓고 그 안에 보관하기도 하고 아니면 살던 집의 대문간에 문형식으로 꾸며 현판을 걸어 두기도 한다. 현재 대부분의 정려는 전자의 형식으로 보존되고 있다. 정려 건축은 기능이 배제된 일종의 기념성 건축물이기 때문에 다른 유교건축과는 다르게 건물의 구성이 1개 동으로 우선 단촐하고 건축의 구조나 의장 등도 지역에 관계없이 공통적인 면이 많다.

정려의 구조 형태는 거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마을 어귀의 독립적인 목조 정각과 가옥의 대문간을 정려(旌門)로 하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목조 정각의 규모는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구성된 경우가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정려자가 거의 한 사람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명정 현판 1매와 기타 정려기 정도를 걸어둘 수 있는 공간만이 필요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3효자, 3세충효, 쌍충, 쌍충일열, 구충 등 여러 명의 정려자가 있을 경우는 2X1칸, 3X1칸, 또는 그 이상으로 규모가 늘어나기도 한다. 가령 경북 달성의 현풍 곽씨 일문에 포상된 12정려를 한 곳에 모신 현풍 곽씨 12정려각은 정면이 12칸이나 된다.

지붕은 맞배와 팔작형태가 주로 보이는데, 이는 지역에 따라 그 구성비율이 다소 다르다. 하지만 대체로 단촐한 맞배구조가 전국적으로 많이 보인다. 가구 구조는 건물의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거의 모두가 단순한 3량가를 채택하고 있다. 기둥은 거의가 두리기둥을 썼으며, 그 위로는 주두를 얹고 창방을 걸었다. 기둥 상부는 민도리형식과 익공형식으로 꾸몄는데 대체로 익공형식을 많이 채택하였다.

정려각의 4면은 보통 벽체를 두지 않고 하인방 위로 홍살만을 꽂아둔다. 즉 내부의 현판과 중앙의 비 등이 잘 보이도록 개방시켜 놓는다. 홍살은 일정한 공간을 신성시하고 경배시할 때 쓰이는 상징성을 갖는 부재로 향교나 왕릉 입구 등에는 반드시 홍살문을 세워 놓는다. 정각 내부 중앙에는 명정현판과 함께 비를 세워놓는 경우도 있고 또는 비만 놓여 있는 경우도 있다. 비에는 보통 현판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는다.

비교대상

운천신도비



운천신도비는 문화재자료 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경북 안동시 임동면 지리 294-1번지에 위치한다. 이 비는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인 김용 선생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김용의 호는 운천으로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임진왜란 당시 안동수성장이 되어 많은 공을 세웠다. 선조실록의 편수관으로 참여하여 수찬에 참여하였다. 안동의 덕봉서원과 묵계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사주문 밖으로 담장이 방형으로 둘러져 있다.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구조를 가지고 있다. 비각 안에 있는 비는 낮은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반달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권태사신도비



권태사신도비는 문화재자료 6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경북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393번지에 위치한다. 이 비는 안동 권씨의 시조인 태사 권행의 업적을 기리여 묘의 남동쪽에 세워져 있다. 비각은 높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담장에 방형으로 둘러져 있으며, 정면의 사주문을 통해 들어설 수 있다. 비는 받침돌 위로 비신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문은 허목(許穆)의 글씨로 새겼다. 비각은 1917년 비를 보호하기 위해 세워졌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공포에 화려하게 단청이 칠해져 있다.



현풍곽씨십이정려각



현풍곽씨십이정려각은 문화재자료 2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지리 1348-2번지에 위치한다. 현풍 곽씨 집안의 유교 도덕에 기본이 되는 삼강을 지킨 28인의 정려비로, 1598년부터 1608년까지 포상된 12명을 모시고 있는 곳이다. 비각은 방형의 담장 안에 있으며, 1칸의 사주문을 통해 들어 설 수 있다. 비각은 정면 12칸, 측면 2칸의 구모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되어 있다. 지붕의 치장이 아름다운데, 처마에 앉아 있는 새가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