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한국국학진흥원

석조건축물

표창시설
비석 신도비
귀부이수비(칠계선생유허비) 가상복원_0 돋보기
비석 신도비

비석 신도비

일반정보

선조가 걸어온 길을 기념하는 비석



신도비는 왕이나 고관의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이다. 대개 무덤 남동쪽에 남쪽을 향하여 세우는데, 신도라는 말은 죽은 자의 묘로, 즉 신령의 길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2품 이상에 한하여 세우는 것으로 제도화하였다. 남양주군 구리읍에 있는 조선 태조릉인 건원릉의 신도비를 비롯하여 홍릉의 세종대왕 신도비, 안산의 정난종 신도비, 아산의 이순신 신도비 등 전국 각지에 많은 신도비가 전한다. 그러나 문종은 왕릉에 신도비를 세우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였고, 공신이나 석학 등에 대하여는 왕명으로 신도비를 세우게 하였다.

용머리와 거북 받침대로 이루어진 기념비

주로 비석의 장엄함과 예술성을 함께 보여줄 수 있는 귀부이수비가 주로 쓰였다. 비신의 대석을 거북모양으로 새기고, 그 위에 비개석을 용틀임이나 운문을 새긴 것을 귀부이수비라 한다. 다만 비개석을 따로 만들어서 위에 씌우는 것이 보통이지만 비신의 위쪽에 용틀임을 한 물에 새긴 것도 이수비라 한다. 이수는 용의 형체를 새겨 장식한 비석의 머릿돌이다. 귀부는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이다. 귀부 위에 비신을 세우고 비신 위에 두 마리 용으로 장식된 이수를 씌우는 것이 보통이다.

전문정보

사적을 기념하는 귀부이수비(龜趺螭首碑)



신도비(神道碑)는 왕이나 고관의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事蹟)을 기리는 비석이다.

대개 무덤 남동쪽에 남쪽을 향하여 세우는데, 신도(神道)라는 말은 죽은 자의 묘로(墓路), 즉 신령의 길이라는 뜻이다. 신도비는 원래 중국 한(漢)나라 양진(楊震)의 고대위양공지신도비(故大尉楊公之神道碑)에서 비롯되어 당시는 종2품 이상의 벼슬을 거친 사람에 한하여 세웠다. 한국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나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동문선(東文選)>>이나 다른 문집에 비문(碑文)이 전할 뿐인데 당시는 3품 이상의 벼슬아치 무덤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2품 이상에 한하여 세우는 것으로 제도화하였다. 남양주군 구리읍(九里邑)에 있는 조선 태조릉인 건원릉(健元陵)의 신도비를 비롯하여 홍릉의 세종대왕 신도비, 안산의 정난종(鄭蘭宗) 신도비, 아산의 이순신 신도비 등 전국 각지에 많은 신도비가 전한다. 그러나 문종은 왕릉에 신도비를 세우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였고, 공신이나 석학(碩學) 등에 대하여는 왕명으로 신도비를 세우게 하였다.

주로 비석의 장엄함과 예술성을 함께 보여줄 수 있는 귀부이수비가 쓰였다. 안동에서 귀부이수비 형태의 신도비로 대표적인 것은 권태사신도비와 학봉신도비가 있다.

비신의 대석을 거북모양으로 새기고, 그 위에 비개석을 용틀임이나 운문을 새긴 것을 귀부이수비(龜趺螭首碑)라 한다. 다만 비개석을 따로 만들어서 위에 씌우는 것이 보통이지만 비신의 위쪽에 용틀임을 한 물에 새긴 것도 이수비라 한다.

이수는 용의 형체를 새겨 장식한 비석의 머릿돌이다. 이(螭)자는 본래 뿔이 없는 용이나 교룡(蛟龍)을 가리키는 글자이다. 그 용어와 양식은 중국에서부터 사용한 것으로, 본래는 이기(彛器), 비액(碑額), 석주(石柱), 석계(石階), 인장(印章), 종(鐘), 정(鼎) 등의 표면과 머리 부분에 용의 형체를 조각하여 장식한 것을 말한다. 이 가운데 비액의 이수가 형체나 크기로 보아 가장 대표적인 것이어서 오늘날의 일반적인 개념이 되었다.

비의 기원은 주대(周代)부터 유래한 목비(木碑)에서 찾는데, 이때는 단조로운 형태의 비신(碑身)뿐이었으며, 이수가 나타나는 것은 한대(漢代)부터이다. 한대의 비의 머리는 원형머리와 규형(圭形)으로 된 두 가지 양식이 있었는데, 특히 둥근머리를 가진 비에서는 훈(暈)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자리를 장식하는데, 이 훈에 가끔 용이나 주작(朱雀) 등을 조식하였던 것이 후세 이수의 기원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시대와 남북조시대, 수대(隋代)를 거치면서 석비양식이 더욱 발전하고, 당나라 때에 와서 지금의 이수와 비신, 방부(方趺), 귀부(龜趺)를 가진 석비양식과 수법의 기본형이 등장하고, 이것이 한국에 전해져 고려시대까지 한국 석비의 기본양식이 되기도 하였다. 당나라 때에 완성된 이수의 특색은 둥근 머리의 형태에 좌우 2-3마리의 반룡(蟠龍)들이 서로 얽힌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반룡의 머리만을 나란히 하여 석비를 물고 비신을 일제히 들어올리는 듯한 형상으로 조각되어 있는 점이다. 이러한 당대(唐代) 석비의 양식이 통일신라시대에 수용되어 한국의 석비에서도 귀부와 이수가 갖춰지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에는 당비의 이수의 특징을 그대로 갖추고 있으나, 9세기 후반기에 가면 둥근 머리형에서 관형(冠形) 또는 개형(蓋形)으로 변화되어 간다.

고려 초기까지 이러한 형식이 이어지다가 12세기 말에는 이수 없는 비신 위에 우진각 지붕형으로 된 규두형(圭頭形) 석비가 나타나고, 14세기 말에는 옥개풍(屋蓋風)의 지붕형 이수를 가진 또다른 형식이 출현한다. 그러다 조선 초기에는 다시 당송시대의 이수를 가진 석비양식이 보이기도 하다가 15세기 말경부터는 고려 말기의 옥개형 석비형식을 기본으로 하는 간략한 양식이 주조를 이룬다

귀부는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이다. 이는 삼국시대부터 쓰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석 위에 네 발을 디디고 등에는 비좌(碑座)를 도드라지게 새겨 비신을 받게 하였으며 뒤에 꼬리를 감아붙였다. 그리고 귀부 위에 비신을 세우고 비신 위에 두 마리 용으로 장식된 이수를 씌우는 것이 보통이다. 귀부의 머리는 내밀어 들고 아구리는 다문 것과 벌려서 여의주를 물은 것도 있다. 눈은 부릅뜨고 응시하며 턱 밑에는 수염과 입가에는 지느러미를 힘차게 나타낸 것도 있다. 등 위에는 6각형의 귀갑무늬를 새기고 또 그 안에 왕자(王字)나 꽃무늬를 새긴 것도 있다.

비좌의 주변에는 운문과 연화문을 새기고 또 높아진 것은 안상을 두기도 하였다. 귀부는 시대가 변하면서 용의 모습 외에 해태 모습을 한 것도 있고, 사실적인 거북 모양에서 점차 변형되어 장중한 것, 패기에 넘치는 것, 우아한 것 등 형태를 달리한 것이 많다. 태종무열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의 귀부와 이수는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높이 평가된다.

비교대상

칠계선생유허비



칠계선생유허비는 경북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칠계재 고택 우측에 위치한다. 이 사적비는 장세규을 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적비이다. 비는 대리석의 둘레 난간 안에 2단의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비 받침은 화강암으로 거북이를 조각하여 비를 받치고 있다. 비는 흰색의 화강암과 대조적으로 검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다. 비신의 앞면에는 <칠계재 장공 세규 사적비>라고 새겨져 있다. 비신 위에는 다시 흰 화강암으로 된 이수가 얹혀져 있다. 이수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하여 놓았고, 좌우 정후면이 대칭으로 되어 있다.



이완장군신도비

이완장군신도비는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상거리에 위치한다. 이완장군 묘에서 100미터 떨어진 곳에 묘를 바라보며 서 있다. 이완장군은 조선 효종 때의 무신으로 162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전공을 세웠다. 이완장군 신도비는 이수, 비신, 귀부로 구성되어 있다. 비각 없이 규모가 큰 신도비가 길가에 세워져 있다. 기단 위에 거북이 송곳니를 드러내고 엎드려 있다. 거북의 등 위로 글씨가 마모된 비신이 있고, 그 위에 용 두 마리가 서로 어우러진 이수가 있다. 귀부와 이수의 조각은 생동감 있게 잘 표현되어 있다.



태자사지귀부 및 이수



태자사지귀부 및 이수는 문화재자료 6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경북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 1082번지에 위치한다. 지금은 폐교가 된 태자분교 왼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비의 일부만 있다. 비는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인 낭공대사의 것으로 전하고 있는데, 현재 비신은 사라지고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네모진 바닥돌 위로 엎드려 있는 비 받침의 형상은 전체 모습이 닳아 있어 옛 모습을 확인할 수 없으나 거북의 형상으로 얼굴이 많이 훼손되어 있다. 받침 위로 놓아둔 머릿돌은 구름무늬가 가득 조각되어 있으며, 앞면 가운데에는 비명칭을 새기는 네모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